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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리형 PTSD, 진단과 개입의 괴리

진단의 제도화와 치료의 부재를 넘어

by 민진성 mola mola

진단 이후 마주한 현실

나는 해리형 PTSD 진단 기준에 해당한다. 실제로 발작처럼 의식을 잃거나, 현실감이 붕괴되는 경험을 반복해왔다. 그래서 진단을 받은 이후, 나는 ‘노출을 넘어선 추가 개입’이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치료 현장에서 돌아온 것은 단 한 가지였다. 발작을 줄여줄 약물 처방. 약이 증상을 완화하긴 했지만, 해리라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가는 개입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진단의 성과와 한계

DSM-5가 해리형을 PTSD의 하위 유형으로 규정한 것은 학문적으로 중요한 성취였다. 이는 PTSD가 단일한 양상이 아니라, 해리적 경험을 중심으로 다른 임상 궤적을 가질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의 임상은 달랐다. 진단은 내려지지만, 그에 맞는 개입은 제공되지 않는다. 해리형은 “존재는 인정되지만 다뤄지지 않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다.



임상 적용에서의 구조적 단절

첫째, 표준화된 개입 프로토콜의 부재. PTSD 치료는 여전히 노출치료와 약물치료라는 오래된 공식을 따른다. 해리형 환자에게 이 공식은 오히려 증상을 악화시킬 수 있음에도, 대체 모델은 충분히 자리 잡지 못했다.

둘째, 정신의료 체계의 제약. 약물 중심의 짧은 진료 체계 속에서 해리에 특화된 심리치료는 구조적으로 접근하기 어렵다. 안정화·통합 개입은 “심리치료에서 해야 할 것”으로 미뤄지지만, 실제로는 비용과 제도의 벽 때문에 환자에게 닿지 않는다. 셋째, 증상 해석의 협소성. 해리에서 비롯된 발작적 양상은 간질이나 공황발작처럼 단순히 신체적 증상으로 분류된다. 결과는 약물 처방의 반복이다. PTSD라는 맥락은 탈락하고, 환자는 이름만 남은 진단을 경험한다.



국제적 대안 사례

해외에서는 해리형 및 복합 외상 환자에게 **단계적 치료 모델(phase-oriented treatment)**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

1단계: 안정화(stabilization) — grounding, 정서 조절, 안전 확보

2단계: 외상 기억 처리(trauma processing) — 제한적 노출, EMDR 등

3단계: 통합과 재활(integration and rehabilitation) — 정체감 회복, 사회적 기능 강화

유럽의 ESTSS(European Society for Traumatic Stress Studies)와 미국의 ISSTD(International Society for the Study of Trauma and Dissociation)는 이러한 단계적 접근을 권고하고 있다. 특히 유럽에서는 보험제도와 연계해 환자가 실제로 해당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시도도 진행 중이다.



비판적 성찰과 제언

해리형 PTSD 진단은 분명 학문적으로는 진보다. 그러나 임상 현실에서 진단은 개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이는 환자에게 “너의 고통은 이름 붙일 수 있지만, 치료할 수는 없다”는 선언과 다름없다.

앞으로 필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해리형 PTSD를 위한 표준 임상 프로토콜 개발

단계적 치료 모델의 제도·보험적 도입

약물 중심 진료를 넘어서는 다학제 협력

해리를 단순한 발작이 아니라 외상 맥락 속 경험으로 이해하는 임상 감수성

진단이 치료로 이어질 때 비로소 해리형 PTSD는 ‘존재하지만 방치된’ 하위 유형이 아니라, 실제로 다뤄질 수 있는 임상적 실체가 될 것이다.




#생각번호2025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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