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출, 애착, 발달가속, 신경생물학, 그리고 구조적 요인의 교차
고등학교 사회문화 교과서에서도 짧게 언급되는 사실 하나가 있다. 아동학대를 경험한 사람들 가운데 조기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빨리 결혼하고 싶어 한다”는 설명이지만, 그 뒤에는 훨씬 더 복잡한 심리적·사회적 기제가 숨어 있다. 단순히 한 가지 이유가 아니라 여러 층위의 요인들이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경향이다.
아동학대는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매일의 생활을 위협하는 환경이 된다. 가정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안전망이 무너질 때, 아이와 청소년은 “이 집을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 목표로 삼는다. 이때 조기 결혼이나 동거는 탈출의 가장 현실적인 선택지로 보이기도 한다. 결혼은 새로운 집, 새로운 관계, 새로운 성인 정체성을 약속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탈출로서의 결혼은 종종 다시 불안정한 환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경제적 의존이나 친밀한 파트너 폭력(IPV) 위험이 높아지는 경우가 대표적이다.
학대 경험은 애착 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든다. 아이는 보호자에게서 안정감을 얻지 못하고, 대신 친밀함을 과도하게 갈망하거나 반대로 두려워하는 양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성인이 되었을 때 이 애착 도식은 “나만의 안전한 가족을 빨리 만들고 싶다”는 충동으로 구체화되기도 한다. 문제는 그 갈망이 급하게 선택된 관계를 정당화하면서, 관계의 질을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과 진화론적 연구에서는 아동기의 역경이 개인의 발달 속도를 앞당긴다고 본다. 환경이 가혹하고 예측할 수 없다고 학습할 때, 몸과 마음은 더 빠른 성적 발달과 재생산 전략으로 이동한다. 사춘기가 빨라지고, 연애와 성적 활동이 앞당겨지며, 자연스럽게 결혼과 출산도 이른 시기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발달가속’은 생존 전략의 일종이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오히려 더 큰 사회적·경제적 위험으로 연결되기도 한다.
특히 성적 학대를 경험한 경우에는 상황이 더욱 복잡하다. 일부는 성에 대한 공포와 죄책감으로 친밀한 관계를 회피하지만, 또 다른 일부는 “사랑받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는 강렬한 욕구 때문에 빠르게 관계를 맺는다. 이 모순된 동력이 조기 결혼이나 동거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친밀성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불안정한 관계에 쉽게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아동기의 트라우마는 뇌와 호르몬 체계에도 깊은 영향을 남긴다. 특히 스트레스 반응을 조절하는 HPA 축(시상하부–뇌하수체–부신)이 과도하게 예민해지거나 반대로 무뎌질 수 있다. 전자는 “지금 당장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는 경보를 울리며 빠른 결정을 촉진하고, 후자는 위험 신호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왜곡된 생리적 반응 역시 조급한 결혼 선택에 기여한다.
학대 경험은 종종 학업 중단, 낮은 경제적 자원, 사회적 지지망 부족과 연결된다. 이 상황에서 결혼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경제적·사회적 안전망의 대체재로 보인다. 특히 일부 지역사회에서는 조혼이 문화적으로 용인되거나 법적 허점 속에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 결과, 학대에서 벗어나려는 결혼이 오히려 또 다른 종속 구조 속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아동학대와 조기 결혼 사이의 연관은 단선적이지 않다. 탈출 욕구, 애착 불안, 발달가속, 신경생물학적 변화, 구조적 제약이 서로 얽히며 나타나는 다경로적 현상이다. 중요한 것은 모든 학대 경험자가 조기 결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어떤 이는 강한 회복탄력성과 지지망 덕분에 학업과 경력을 이어가며,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하기도 한다.
따라서 아동학대와 조기 결혼의 연결을 단순한 인과로 설명하는 것은 위험하다. 개인을 낙인찍지 않으면서도, 실제 위험을 줄이는 보호와 지원 정책을 설계하기 위해서는 이 복합적 경로를 인정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생각번호202509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