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육의 사적 책임과 사회적 개입 사이

아동학대 조기 발견을 둘러싼 풀리지 않는 딜레마

by 민진성 mola mola

아동학대 문제를 이야기할 때마다 부딪히는 모순이 있다. 피해 아동을 지키려면 사회가 가정에 개입해야 한다. 하지만 사회가 개입하려면 먼저 양육을 가정의 전적인 책임으로 두는 전제를 흔들어야 한다. 문제는, 이 전제를 흔드는 순간 다른 질문이 꼬리를 문다. “과연 국가는 어디까지 가정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가?”



가정은 누구의 영역인가

현대 사회에서 가정은 여전히 가장 사적인 공간으로 간주된다. 부모는 아동의 양육권과 교육권을 헌법적 권리로 보장받고, 국가는 이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정책을 설계한다. 아이의 보육과 양육은 가정의 몫이고, 국가는 지원만 할 뿐이다. 이 구조는 부모의 자율을 지켜주는 동시에, 학대나 방임이 일어났을 때 개입의 문턱을 높인다.



사회적 개입이 필요할 때

한편, 아동학대는 대개 가정 내부에서 발생한다. 피해 아동이 스스로 구조를 요청하기 어려운 만큼, 사회가 먼저 다가가야 한다는 명분은 충분하다. 기술적 대안이든 제도적 장치든, 결국은 가정 바깥에서 아이를 관찰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 한다. 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혹은 공공기관이 그 역할을 맡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지점에서 또 다른 질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양육과 보육의 일부를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하지 않을까?”



책임의 분산, 그리고 불안

양육의 사회화를 받아들인다면, 사회는 가정의 폐쇄성을 넘어 개입할 근거를 얻는다. 정기 검진, 공적 보육, 학교 기반 상담 같은 제도는 아동을 사회와 자연스럽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가정의 권한이 줄어드는 과정으로 비칠 수 있다. 부모 입장에서는 “내 아이를 국가가 빼앗아 간다”는 불안이, 사회 입장에서는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는 부담이 따라붙는다.



해외의 다른 길: 북유럽과 한국

북유럽 국가들은 일찍부터 양육의 사회화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켰다. 덴마크, 스웨덴에서는 아동이 태어나면 일정 주기마다 보건소에서 발달 검진을 받도록 되어 있다. 부모의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의무다. 보육기관 이용률도 매우 높아, 사실상 모든 아동이 가정 밖에서 최소 하루 몇 시간은 사회와 접촉한다. 이는 단순한 교육 서비스가 아니라, 아동을 가정 바깥 눈길에 노출시켜 조기 발견의 통로를 확보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반대로 한국은 여전히 가정 양육을 이상적 모델로 강조한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제도가 있지만, 부모가 맡기지 않겠다고 하면 사회가 개입할 통로가 거의 없다. 정기 검진조차 부모의 협조에 크게 의존한다. 그 결과, 학대가 발생해도 사회가 알게 되는 시점은 이미 늦은 경우가 많다.



풀리지 않는 균형

아동학대를 예방하려면 사회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개입이 과해지면 가정의 자율은 침해된다. 반대로 가정의 자율을 존중하면, 아이는 위험에 방치될 수 있다. 북유럽은 사회적 책임을 크게 확장해 위험을 줄였지만, 그만큼 막대한 세금과 국가 개입을 받아들이는 사회적 합의가 뒷받침되어 있다. 한국은 아직 가정의 권한을 우선하는 문화 속에 머물러 있다.


아마 해답은 당분간도 명쾌하게 나오지 않을 것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아동을 지키려는 노력은 가정의 권리와 사회의 책임 사이에서 끊임없이 줄다리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북유럽이 보여주는 길과 한국이 붙잡고 있는 현실 사이, 그 간극을 어떻게 좁힐지는 앞으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숙제다.




#생각번호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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