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문법이 형성되는 순간, 개입이 필요한 이유
사람의 인생은 언제 결정될까. 우리는 종종 “성인이 되어 본인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심리학과 신경과학이 말하는 바는 조금 더 잔혹하다. 인생의 기본 문법은 이미 생애 초기, 아주 어린 시절에 짜여진다는 것이다.
0세에서 7세까지는 뇌의 신경망이 가장 활발하게 연결되는 시기다. 이 시기에 아이가 겪는 애착 경험, 정서 조절 방식, 주변 세계에 대한 기본 감각이 성격과 가치관, 성향의 토대를 이룬다.
안전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은 믿을 만하다”는 전제를 습득한다. 반대로 혼란과 위협 속에서 자란 아이는 “세상은 위험하다”는 문법을 내면화한다. 이 전제는 이후 수많은 경험을 해석하는 필터가 되고, 삶의 선택지와 방향까지도 바꾼다.
만성적인 외상은 단순히 힘든 기억을 남기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아이의 뇌와 몸, 그리고 세계관을 통째로 바꾼다.
심리적 차원: 세상을 불신하고, 자신을 무가치하게 느끼며, 인간관계를 회피하거나 집착하게 된다.
신경생물학적 차원: 스트레스 반응 체계(HPA axis)는 과잉 반응을 보이고, 편도체는 위협을 과대평가하며, 전전두피질은 억제 기능을 잃는다.
세계관 차원: “나는 안전하지 않다, 세계는 적대적이다”라는 왜곡된 기본 문법이 형성된다. 이 문법은 마치 언어처럼, 그 뒤의 삶 전체를 해석하는 틀이 된다.
물론 초기 외상이 인생을 완전히 고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후의 치료적 개입, 신뢰할 수 있는 관계, 새로운 경험은 왜곡된 문법을 다시 써내려갈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한 번 굳어진 문법을 수정하는 데는 훨씬 더 많은 시간, 에너지, 사회적 비용이 든다. 마치 잘못 학습한 외국어 표현을 고치려면, 올바르게 배우는 것보다 몇 배의 노력이 필요한 것과 같다.
결국 핵심은 단순하다. 생애 초기의 외상은 아이의 세계관을 뒤틀고, 그 뒤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나 조기에 발견하고 개입한다면, 그 왜곡은 문법이 되기 전에 수정할 수 있다.
조기 개입은 단지 개인을 구하는 일이 아니다. 성인기의 정신질환, 범죄, 사회적 비용을 줄이는 일이기도 하다. 사회 전체가 “가장 어린 시절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투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이는 세상을 배우는 중이다. 우리가 어떤 세상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세계는 따뜻한 언어로 쓰일 수도, 차갑고 뒤틀린 언어로 고착될 수도 있다. 인생의 문법은 그렇게 결정된다. 그러므로 조기 개입은 선택이 아니라, 우리가 져야 할 의무다.
#생각번호20250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