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아동은 학대를 학대로 인식하지 못하는가

조기 발견이 필요한 근본적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아동학대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종종 “왜 아이가 스스로 신고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 질문 자체가 상황을 오해한 것이다. 많은 아동은 자신이 겪는 일이 학대라는 사실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채 자란다. 학대는 단순히 고통의 경험이 아니라, 아이의 현실 인식을 형성하는 환경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비교 기준이 없는 세계

아동은 자라면서 자신이 겪는 환경을 ‘정상’으로 받아들인다. 다른 가정의 양육 방식을 직접 경험하거나 비교할 기회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동기 학대를 경험한 아이들 다수는 “다른 집도 다 비슷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성장한다. 언어적, 신체적 폭력이 반복되면, 그것은 곧 세계의 기본 문법이 되어버린다.


애착의 역설

부모는 동시에 보호자이자 학대자일 수 있다. 이중적 위치 때문에 아이는 관계를 부정하기 어렵다. 심리학 연구에서는 이를 애착의 역설이라고 부른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하면서도, 생존을 위해 그 관계에 매달려야 한다. 그 결과, “내가 잘못했으니까 맞는 거야” “사랑하니까 때리는 거야”라는 식의 내적 합리화가 발생한다. 이 과정은 학대를 “정상화”하는 강력한 장치로 작동한다.


사회적 메시지의 함정

사회적·문화적 맥락도 학대의 인식을 흐린다. 체벌이 용인되거나 “매는 사랑의 표현”이라는 담론이 강한 사회에서는, 아동이 느끼는 고통이 쉽게 정당화된다. 실제로 아동학대 피해자 연구에서는, 상당수가 성인이 되어서야 “그 경험은 정상적 훈육이 아니라 학대였다”는 언어를 처음 접한다고 보고한다.


지연 인지와 외상 반응

외상의 인식은 종종 성인이 된 뒤, 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CPTSD) 증상이 발현되면서 이루어진다. 미국과 유럽의 추적 조사에 따르면, 아동기 학대 피해자 상당수는 성인기 우울증·불안장애·신체화 증상을 겪으며 과거를 재해석하게 된다. 즉, 아동기에는 ‘정상’이라 여겼던 경험이, 성인이 되어 심리적·신체적 결과로 드러나면서 비로소 학대로 명명되는 것이다.


조기 발견이 필요한 이유

이 모든 맥락은 한 가지 결론으로 모인다. 아동 스스로 학대를 신고하거나 구조를 요청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상황을 학대로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기 발견은 아동 자신의 목소리에 기대어서는 안 되고, 교사·의료진·지역사회가 ‘대리 인지자’ 역할을 해야 한다. 지속적인 멍, 두려움 반응, 발달 지연, 위축된 행동 같은 객관적 징후를 통해 구조 신호를 포착하는 체계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결론

아동학대는 피해 아동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 안에서 자란 아이에게는 학대가 곧 ‘일상’이자 ‘정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동학대 예방의 핵심은 자기신고가 아니라 조기 발견이다.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아이가 왜 말하지 않았을까?”가 아니라, “사회는 왜 아이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지 못했을까?”




#생각번호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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