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거가 없었다면 난 괜찮았을까? 과학이 말하는 ‘지연 발현’의 진실
많은 사람들이 CPTSD(복합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어느 날 갑자기” 발병하는 병처럼 느낀다. 나 역시 그랬다. 잘 버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계기를 만난 뒤 모든 게 한꺼번에 무너진 것 같았다. 그런데 연구를 들여다보면, 지연 발현(delayed onset) PTSD는 전체 PTSD 환자 중 약 20~30%에 불과하다. 생각보다 비율이 높지 않은 셈이다.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이들 중 상당수가 발현 전부터 경미한 불면, 경계심, 회피 같은 부분 증상을 겪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정말 아무 일 없던 사람이 갑자기 발병”한 게 아니라, 아주 낮은 수준의 불균형이 오랫동안 축적되다가 어느 순간 임계점을 넘은 것이다.
그렇다면 “트리거가 없었다면 괜찮았을까?”라는 질문이 생긴다. 과학적 대답은 ‘가능하지만 보장되지 않는다’이다.
트리거(촉발 사건)는 말 그대로 스위치를 켜는 역할을 한다. 관계 단절, 큰 스트레스, 신체 질환 같은 사건이 이미 취약해진 신경계를 자극하면서, 편도체·해마·전전두엽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고 공포 기억이 활성화된다. 하지만 강한 트리거가 없었다고 해서 평생 안전한 건 아니다. 작은 스트레스가 누적되거나, 신체적·호르몬 환경이 변해도 발현될 수 있다.
이 점은 오히려 희망적이기도 하다. 트리거를 무조건 피하는 게 아니라, 안전한 조건에서 조금씩 감각을 회복하고, 자기 조절 능력을 키우면 임계치를 높일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지연 발현군은 발병 시점이 늦기 때문에 진단과 치료가 늦어지기 쉽다. 하지만 그만큼 신경계가 오래 버틴 사람들이다. 연구에 따르면, 조기 개입과 환경 안정화가 이루어지면 지연 발현군은 비교적 예측 가능한 회복 경로를 밟는 경우가 많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서 있지만, 이 경험을 통해 내 신경계가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어떤 신호가 나를 위험으로 이끄는지 알게 되었다. 그 기록은 앞으로 나를 지켜줄 중요한 자료가 된다.
지연 발현 CPTSD는 인생을 뒤집는 사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오랫동안 보내온 작은 신호들이 쌓인 결과다.
그렇기에 이것은 더 이상 “운명”이 아니라 “지표”가 된다. 나를 무너뜨린 사건이 아니라, 나를 돌봐야 한다는 경고등. 이제 그 신호를 읽고, 내 삶의 버퍼를 만들며, 조금씩 임계치를 높이는 것. 그것이 늦게 찾아온 폭풍을 의미 있게 만드는 방법이다.
#생각번호20250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