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안정의 부익부 빈익빈

가장 절실한 사람들이 가장 부족하게 되는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아동학대나 만성적 외상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늘 예측 불가능한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오늘은 무사할지, 내일은 또 어떤 일이 닥칠지 알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가장 절실한 욕망은 단 하나다. “빨리 안정된 울타리를 만들고 싶다.”


이 욕망은 종종 조기 결혼이나 빠른 독립, 혹은 강렬한 관계 추구로 드러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보상적 안정 욕구라고 설명한다. 안정적이지 못했던 성장 배경을 메우기 위해, 타인의 사랑과 관계 속에서 스스로를 지키려는 시도다.



안정은 왜 불평등하게 분배되는가

문제는 아이러니다. 안정을 이미 경험해본 사람은 관계에서 불안이 적고, 자신을 존중하며, 타인에게도 편안함을 준다. 그 결과 더 많은 사랑과 신뢰를 얻고, 더 많은 기회를 누린다.


반대로 외상에 노출된 사람은 관계에서 불안을 드러내기 쉽다. 지나친 의존과 거리두기가 교차하는 양가적 패턴, 버려질지 모른다는 공포, 끊임없는 자기검열. 이런 모습은 사실 생존을 위해 배운 문법이지만, 새로운 관계에서는 종종 “불안정하다”는 인상으로 읽힌다. 결국 안정이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 안정적 관계에서 가장 멀어지게 된다.



애착 연구가 보여주는 패턴

이 현상은 오래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Mary Ainsworth의 고전적인 애착 연구는 아동의 초기 양육 경험이 안정 애착, 불안정 애착(회피형·양가형)을 구분 짓는다고 보여주었다. 안정 애착을 형성한 아동은 성인이 되어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지만, 불안정 애착을 가진 아동은 성인이 된 후에도 사랑과 안정의 불균형을 경험하기 쉽다.


또한 미국 CDC와 Kaiser Permanente가 진행한 ACEs 연구(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Study)는 아동기 학대나 방임을 경험한 사람일수록 성인기 관계 문제, 정신건강 문제, 신체적 질환의 위험이 유의미하게 높아진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즉, 외상 경험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이후 삶 전반에 걸쳐 사랑과 안정의 기회를 제약하는 요인으로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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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구조는 연인 관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친구 관계, 직장, 공동체 전반에서 똑같이 나타난다. 안정적인 사람은 더 많은 사랑을 얻고, 더 많은 지지를 받으며, 사회적 네트워크가 점점 두터워진다. 외상 경험자는 더 강렬하게 사랑과 안정을 추구하지만, 오히려 그럴수록 기회는 적어진다. 사랑과 안정은 필요에 따라 배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미 가진 사람에게 더 풍부하게 쏠리고, 없는 사람에게는 더 부족해진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성격 문제가 아니라, 외상이 만들어낸 사회적 불평등이다.



서러움에서 사회적 이해로

가장 서러운 것은, 이 불평등이 종종 개인의 탓으로 돌려진다는 점이다. “왜 그렇게 집착하느냐”, “왜 그렇게 불안하냐” 이런 말은 그들의 삶이 어떤 문법 속에서 형성되었는지 이해하지 못한 태도다. 아이가 성장 과정에서 어떤 환경을 겪었는지,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배웠는지를 고려하지 않는 판단이다.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이들을 ‘문제적 개인’으로 낙인찍는 것이 아니다. 사랑과 안정의 부익부 빈익빈이 외상의 구조적 결과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다.


사랑과 안정은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가장 부족하다. 반대로 이미 안정적인 사람에게 더 풍부하게 쏠린다. 이는 개인의 탓이 아니라, 애착 연구와 외상 연구가 입증하듯, 환경이 만들어낸 불평등이다. 따라서 질문은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왜 저 사람은 그렇게 불안한가?”가 아니라, “우리는 왜 가장 절실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안정을 나누어주지 못하는가?”




#생각번호202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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