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과 침묵을 넘어, 나만의 정의로 마음을 세우다
아빠가 말했다. “들어쳐먹어라.” 순간 머리가 하얘지고, 심장이 빨라졌다. 나는 그 말이 단순히 화난 사람의 욕설이 아니라 나를 낮추는 명령처럼 느껴졌다. 말은 공기 중에 흩어졌지만, 그 말이 남긴 잔향은 몸에 남았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언어적 공격이 상대의 무력감과 수치심을 감추려는 방어기제라고 말한다. 투사(projection)라고 부르는 이 현상은, 자신의 감정을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에 그 감정을 상대에게 돌려버리는 것이다. Bushman & Baumeister(1998)의 연구에서는 공격적 언어를 쓰는 것이 말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순간적으로 높인다고 보고했다. 즉, 그 말은 나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라기보다 그 순간 아빠 자신이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나온 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유를 안다고 해서 상처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지속적으로 이런 말을 듣는 사람은 자기 가치감이 낮아지고, 우울과 분노, 불안이 강화된다고 한다(Domínguez-García & Fernández-Berrocal, 2018). 나는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죄책감이 밀려오고, 어쩌면 정말 내가 문제인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든다.
나는 이제 경계를 세운다. “그런 말은 상처가 되니까 듣지 않겠어.” 대화를 끊고 방에 들어간다. 이건 회피가 아니라 나를 지키는 선택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행위를 자기 보호(self-protection)라고 부른다. 상대가 감정을 다스릴 수 있을 때까지 나의 공간을 확보하는 일이다.
그 말이 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 그 말은 상대가 감당하지 못한 감정이 흘러넘친 흔적이라는 것. 그리고 나는 그 말을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내 안에서 그 말의 힘을 걷어내는 순간, 나는 다시 내 자리로 돌아온다.
https://doi.org/10.1037/0022-3514.75.1.219
→ 공격적 언어와 행동이 순간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자존감을 높이며, 자기방어 기능을 한다는 연구.
Domínguez-García, E., & Fernández-Berrocal, P. (2018). The association between emotional intelligence and suicidal behavior: A systematic review. Frontiers in Psychology, 9, 2380.
https://doi.org/10.3389/fpsyg.2018.02380
→ 언어적·정서적 폭력 경험이 자존감, 우울, 불안, 자살사고와 연결된다는 종합 연구 결과 포함.
Linehan, M. M. (1993). Cognitive-behavioral treatment of borderline personality disorder. New York: Guilford Press.
→ 언어적 공격, 정서적 폭력이 장기적으로 정체감 혼란과 감정 조절 문제를 유발할 수 있음을 설명.
van der Kolk, B. A. (2014). The body keeps the score: Brain, mind, and body in the healing of trauma. New York: Viking.
→ 언어적 트라우마도 신체가 기억하고 과각성 증상을 일으킬 수 있음을 신경과학적으로 분석.
아빠와 대화하다 보면 나는 차분한데, 아빠는 격해져 있을 때가 많다. 내가 말한다. “전 그럴 의도 없어요. 왜 과잉 해석해서 기분 상하세요?” 처음에는 부정하다가, 잠시 후 다시 예전 행동으로 돌아간다. 그 순간 나는 묘한 감각을 느낀다. 마치 내가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 게 더 불편한 듯한 표정. 마치 “너도 화내야지, 같이 흔들려야지”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을 받는 기분이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감정 불일치(emotional mismatch) 라고 부른다. 한 사람이 격한 감정을 표현할 때 다른 사람이 차분하면 격한 쪽은 감정을 무시당했다고 느낄 수 있다 (Butler et al., 2003). 그 불편함을 줄이기 위해 상대는 분노를 키우거나, 공격적 언행으로 대화를 “같은 온도”로 맞추려 한다. 나는 이제 안다. 그건 나 때문이 아니라 상대의 감정 조절 방식 때문이다.
나는 한때 시험 점수가 나오지 않으면 자기부정에 빠졌다. 밤새 책상에 앉아, “나는 왜 이것밖에 안 되지?” 하면서 더 비효율적인 공부를 했다. 하지만 결국 깨달았다. 부족함을 인정하고, 어디서 틀렸는지, 어떤 부분을 못 봤는지를 분석하는 순간 성적의 기복이 줄고 공부가 효율적으로 변했다. 그때부터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 더 이상 큰 감정 소모를 하지 않는다. 그건 나를 공격하는 말이 아니라, 나를 개선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연구에 따르면 부족함을 인정하는 태도는 성장 마인드셋(growth mindset)과 연결된다 (Dweck, 2006). 이런 태도를 가진 사람은 실패를 자신의 가치에 대한 위협으로 보지 않고 학습의 기회로 인식해 더 빠르게 회복한다. 반대로 자기 자존감이 성취에만 달려 있는 사람은 부족함을 지적받을 때 수치심을 느끼고 방어적으로 굳어버린다(Baumeister et al., 1996). 아빠의 격한 반응은 어쩌면 나보다 자기 자신에게 그 말이 더 위협적으로 들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감정적으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그게 무정하거나 냉정한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오히려 그 차분함은 나를 지키는 방패다. 그리고 부족함을 인정하는 건 나를 낮추는 일이 아니라 나를 개선하기 위한 첫 단계다. 나는 더 이상 자기부정 속에 갇혀 있지 않다. 부족함을 인정할수록 나는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Butler, E. A., Egloff, B., Wilhelm, F. H., Smith, N. C., Erickson, E. A., & Gross, J. J. (2003). The social consequences of expressive suppression. Emotion, 3(1), 48–67.
→ 감정 표현의 불일치가 관계에서 불편함과 갈등을 높일 수 있음을 보여주는 연구.
Baumeister, R. F., Smart, L., & Boden, J. M. (1996). Relation of threatened egotism to violence and aggression: The dark side of high self-esteem. Psychological Review, 103(1), 5–33.
→ 자존감이 위협받을 때 방어적 분노와 공격성이 나타난다는 연구.
Dweck, C. S. (2006). Mindset: The new psychology of success. New York: Random House.
→ 성장 마인드셋이 실패와 부족함을 학습의 기회로 전환하는 과정을 설명.
"나쁜 아빠였다. 이제 좋은 아빠가 되고 싶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내가 원하는 건 완벽한 아버지가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달라지고 싶다는 최소한의 태도였다. 하지만 그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변명과 화, 침묵, 농담, 합리화가 번갈아 돌아왔다. 그럴 때마다 답답했다. 왜 그 말을 못 할까, 정말 그렇게까지 어려운 말일까.
심리학에서는 사과를 ‘자기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본다. 수치심이 강하게 작동하면 사람은 방어·부인·분노 같은 회피 행동을 택한다. “나쁜 행동을 했다”가 아니라 “나는 나쁜 사람”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질까 두려운 것이다. 남성은 여성보다 사과할 필요가 있다고 느끼는 기준이 높아 같은 상황에서도 사과를 요구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전통적 아버지상은 잘못을 인정하는 말을 권위 상실로 해석하기 쉽다. 죄책감이나 수치심을 다루는 기술이 부족할수록 농담·허세·폭언으로 감정을 덮는 경우가 많다. 가족폭력 경험이 있는 세대에서는 사과 회피가 세대 간 반복되는 경향도 발견된다. 잘못을 인정하는 순간, 집안의 서사를 흔드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런 설명을 알게 되어도 마음이 풀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그렇다 치고, 왜 아직도 그 말을 못 하지?"라는 질문만 남는다. 설명은 논리지만, 납득은 감정이다. 결국 “그냥 아빠가 이상한 거 아냐?”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이제는 안다. 그가 말하지 않는 건 내 탓이 아니고, 그의 침묵이 내 경험을 지우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해서 그 말을 기다리지 않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그 말이 궁금하고, 그 말이 나오면 내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해 본다.
#생각번호2025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