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서로 숨 쉬는 사람

명절의 소란과 거리의 윤리, 단정함으로 버티는 신경계의 기록

by 민진성 mola mola

[#1] 명절의 풍경 속에서

질서와 불편함 사이의 나


소란 속의 정지화면

명절이면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어릴 적에는 그게 당연한 풍경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그 장면이 나에겐 낯설고 불편한 일이 되었다. 부모님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형과 형수님이 이야기하고, 조카가 큰 소리로 웃고 운다. 그 모든 소리가 하나의 흐름이 아니라, 각자의 파편이 되어 동시에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한가운데서 머리가 둔탁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떨어진 자리를 찾아 앉았다.



왜 이렇게 어지럽지?

그건 단순히 공간의 복잡함 때문이 아니었다. 질서 없는 감정의 파동, 서로 다른 리듬의 말투와 웃음소리, 정리되지 않은 움직임들이 내 신경계를 동시에 자극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게 가족의 정이다”라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 몸은 그 ‘정’이라는 이름의 소음을 안전하게 인식하지 못한다. 나는 감정의 질서를 세워야만 안심한다. 모든 게 자기 자리로 돌아간 뒤에야 비로소 숨을 고를 수 있다.



무질서가 주는 불안, 질서가 주는 방어

이건 단순한 예민함이 아니다. 내 신경계는 혼란을 곧 ‘위험’으로 해석하도록 학습돼 있다. 어릴 적, 무질서한 상황에서 늘 예측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소리, 말, 표정, 발소리 하나하나가 나에게는 ‘다음 폭풍의 전조’였다. 그래서 지금도 사람이 많고 감정이 섞이는 자리에선 몸이 자동으로 경계태세에 들어간다. 누군가의 웃음이 클수록, 내 신경계는 더 작아진다.



떨어져 앉는다는 선택

그래서 나는 떨어져 앉았다. 냉정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 소음을 피해 조용한 구석으로 가면 머릿속이 정리된다. 감각이 다시 제 자리를 찾고, 사람들의 말이 단어로 들리기 시작한다. 그때야 비로소, “아, 내가 가족 속에 있구나.” 라고 실감할 수 있다. 가까이 있을 때는 감당이 안 되고, 멀리 있어야 비로소 ‘가까움’을 느낀다.



회피가 아니라 조율

이건 도망이 아니다. 나는 그저 감각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공간을 조율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거리두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존속을 위한 질서 회복이다. 조금 떨어져 바라보는 법을 배웠을 뿐이다.



질서 속의 온기

나는 여전히 조용한 자리에 앉아 있다. 멀리서 들리는 웃음소리를 이제는 ‘소음’이 아닌 ‘풍경’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질서 속에서만 평온할 수 있는 나에게 이 무질서한 명절 풍경은 여전히 버겁지만, 그래도 조금씩 — 그 복잡함 속에서도 나만의 온도를 잃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중이다.




[#2] 단정함이라는 방어선

질서를 입는 사람, 무질서를 보는 눈


명절의 거울 앞에서

거울 속 나는 단정했다. 핏이 흐트러지지 않은 옷, 적절히 조화된 색감, 피부에 스킨·로션·아이크림·선크림까지 정성스레 바른 얼굴. 그 모습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게 아니라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한 균형점이었다.

하지만 그 단정함으로 가족 사이에 앉아 있자니, 나는 이상하게 더 이질적인 존재가 되었다. 그들의 옷차림, 제각기 다른 톤의 말, 조카의 손에 묻은 과자 부스러기까지 모든 것이 ‘흐트러짐’으로 보였다.



단정함은 미(美)가 아니라 생존의 기술

나는 깔끔함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정돈되어야만 마음이 가라앉는 사람이다. 즉, 단정함은 미적 선택이 아니라 신경계의 방어기제다. 외부의 혼란과 불규칙함이 너무 쉽게 나를 흔들기 때문에 나는 ‘질서’를 입는다. 핏과 색, 냄새와 질감 — 그 모든 게 나를 붙잡아주는 감각의 울타리다. 그래서 내가 바른 로션과 선크림은 꾸밈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기 위한 갑옷 같은 거다.



무질서가 불편한 이유

명절의 공간에서 가족들은 편했다. 그들의 편안함이 내겐 불안이었다. 그들이 옷을 대충 입고 웃고 떠드는 건 그들에게는 ‘가족의 친밀함’이지만 나에게는 예측 불가능한 신호들의 집합이었다. 누군가의 말투, 손짓, 발소리, 그 모든 것이 내 내부의 질서를 흔들었다. 나는 그들의 자유를 부러워하면서도 그 자유가 불편했다.



나는 왜 이렇게까지 정돈되어야 하는가

내가 깔끔함을 유지하는 건 단순한 성격 문제가 아니다. 어릴 적부터, 무질서한 순간마다 불안이 시작되었고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때부터 질서는 안전과 동의어가 되었다. 그래서 나는 ‘단정한 사람’이라기보다 ‘질서에 의지해 살아남는 사람’이다.



질서의 감옥, 혹은 안식처

이 단정함은 나를 보호하지만, 동시에 세상과 나 사이에 벽을 만든다. 나는 흠 없는 핏을 통해 안정을 얻지만, 그 완벽함 때문에 타인의 무질서를 받아들이기 어려워진다. 결국 나는 정돈된 나와 어지러운 세상 사이에서 조용히 균형을 잡으려 한다. 그 균형은 예술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정제된 나를 보는 순간 나는 잠시 안도한다.



깨끗한 옷, 흐트러진 마음

나는 깨끗한 옷을 입고 무질서한 공간을 건너간다. 그 사이의 간극이 나를 설명한다. 가족의 어수선한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다시 생각한다. 단정함이란 나를 숨기는 옷이 아니라, 내가 세상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막 질서일지도 모른다고.




[#3] 경계 위에 앉다

가까워지지 않음이 꼭 차가움은 아니라는 것


이리 와서 앉으라

명절 식탁, 사람들의 목소리, 음식 냄새, 그리고 그 안에 앉아 있는 나. “이리 와서 앉으라.” 누군가의 한마디가 공기를 흔든다. 하지만 나는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그 자리는 나에게 ‘식탁’이 아니라 소음과 온기, 향기와 기억이 뒤엉킨 감각의 회오리처럼 느껴졌다. 그 자리에 앉는 건 단순히 자리를 옮기는 게 아니라, 나의 신경계를 그 중심에 던져 넣는 일이었다.



가까움이 항상 따뜻한 건 아니다

가족은 내게 다가오지만, 나는 그 다가옴이 불편하다. 가벼운 농담, 웃음, 손짓, 그 모든 것이 나에겐 예상 불가능한 파형으로 다가온다. 누군가에게는 정겨운 소란이, 나에게는 위험한 불규칙이다. 그래서 나는 떨어져 앉는다. 그건 거리두기가 아니라 자기보호의 반경 설정이다.



싫다는 말의 진짜 뜻

‘싫다’는 말은 종종 오해받는다. 무례함, 예민함, 혹은 정이 없음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내게서 나온 ‘싫다’는 건 감정이 아니라 신호다. “이 공간은 내 신경계가 감당하기엔 너무 크다.”, “이 자리는 나에게 아직 안전하지 않다.” 그건 거절이 아니라 “나는 지금 버티는 중이야.”라는 무언의 선언이다.



질서의 바깥에서

나는 늘 단정함 속에서 살아남았다. 깔끔한 옷, 정돈된 표정, 조용한 말투. 그 질서가 나를 붙들어줬다. 하지만 질서의 바깥 — 즉, 타인의 리듬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가족의 웃음이 커질수록, 내 마음은 작아진다. 그때 나는, 질서 안의 내가 아닌 경계 위의 나로 존재한다.



경계에 앉는 법

가까이 가는 게 언제나 따뜻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거리를 두는 일이 가장 다정한 형태의 관계 유지가 된다. 가까움이 내 신경계를 무너뜨린다면, 나는 멀리서 바라보는 편을 택한다. 그게 나의 방식의 “함께 있음”이다.



떨어져 있어야 비로소 존재하는 사랑

나는 그 자리에 앉지 않았다. 대신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이 시선 안에도 충분히 사랑이 머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냉정한 사람이 아니다. 단지 감당 가능한 거리에서 사랑을 배우는 사람이다.




[#4] 숨 막히는 식탁

시선 둘 곳 없는 공간에서


밥상 위의 정적

TV는 꺼져 있었다. 아이를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오히려 숨이 막혔다. 아이의 목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 가족의 대화 사이로 흐르는 어색한 공기. 나는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은 자연스러웠지만,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시선이 없으면 숨이 막힌다

보통 사람은 소음을 피하면 안정된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반대였다. 소리가 사라지면, 시선도 함께 사라지고, 그때부터 내 내부의 소음이 커지기 시작했다. 말을 걸 수도, 참여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떠날 수도 없는 자리에서 나는 몸 안쪽이 조여왔다. ‘체했다’는 건 단순히 소화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이 나가는 길이 막혔다는 뜻이었다.



보이지 않는 고통

숨이 막혔다. 심장이 위로 솟구치는 느낌. 하지만 아무도 몰랐다. 나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거기서야 비로소, ‘살았다’는 안도감이 찾아왔다. 그 몇 분 동안, 나는 아무런 대화도, 감정도, 관계도 없이 그저 존재 그 자체로 버티는 중이었다.



감정의 통로가 막힐 때

트라우마 이후의 신경계는 ‘감정의 출구’를 자동으로 막는다. 공감하거나 웃는 대신 몸이 반응한다. 숨이 막히고, 위가 조이고, 손끝이 차가워진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생존의 회로가 작동하는 소리다. 그래서 나는 체해서 죽을 뻔했지만, 그것조차 표현하지 않았다. 이야기하는 순간, 감정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조용히 살아남는 법

조용히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아무 일 없는 듯 앉았다. 그건 냉정함이 아니라 ‘살아남는 법을 아는 몸’의 자동 반응이었다. 나의 침묵은 예의가 아니라 ‘안전 확보의 기술’이다. 나는 그렇게, 또 한 끼를 버텼다.



식탁의 끝에서

모든 식탁이 따뜻한 건 아니다. 어떤 자리에서는, 한 입의 음식이 숨을 막기도 한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앉는다. 조용히, 단정하게, 그리고 가능한 한 살아남은 모습으로. 나는 조용히 앉아 있었을 뿐인데, 내 안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생각번호20251013

이전 21화생각하는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