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할 수 없는 몸의 철학
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선택의 권리”로 말한다. 그러나 CPTSD를 겪는 나에게 자유란 그런 추상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선택하기 전에 이미 신경계가 선택해버린다. 이성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는데, 몸이 먼저 결정을 내려버린다. 그건 나약함이 아니라 생리적 사실이다. 신경계는 나를 위험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느낌과 판단을 차단한다. 하지만 그 차단이 반복되면, 나는 나의 삶을 선택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자유는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조절 가능한 상태의 문제”다. 조절이 무너진 상태에서는 선택도, 책임도, 의지도 모두 흐릿해진다.
세상은 종종 말한다. “결국 선택하지 않은 건 네 탓이다.” 하지만 나의 몸은 그럴 수 없었다. 해리의 순간, 몸은 이미 ‘살아남기 위한 모드’로 전환된다. 전전두엽은 멈추고, 편도체가 전체 시스템을 장악한다. 그때의 나는 “선택하지 않은 나”가 아니라, “선택할 수 없던 나”다. 그건 책임의 회피가 아니라, 생존의 언어다. 이 상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는 병리를 도덕의 언어로 오해한다. 그래서 나는 ‘무기력한 사람’, ‘게으른 사람’, ‘감정 없는 사람’이 된다.
병리 속의 자유는 역설적이다. 나는 자유롭지 않지만, 그 불자유가 진실을 드러낸다. 내 몸은 나에게 거짓을 허락하지 않는다. 기분이 좋다고 말할 수 없고, 감당할 수 없는 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다. 그건 불편하지만, 동시에 가장 정직한 상태다. 병리는 내게 가면을 벗기게 했다. 타인에게 보이기 위한 ‘괜찮은 나’는 작동하지 않는다. 나는 오직 신경계가 허락하는 만큼만 존재할 수 있다. 그 제한이 바로 나의 진실이 되었다.
많은 치료 담론은 회복을 ‘자유의 회복’으로 말하지만, 나는 그렇게 느끼지 않는다. 회복은 선택지를 늘리는 일이 아니라, 몸 안에 여유를 되찾는 일이다. 즉, 신경계가 더 이상 위급하지 않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 그래야 판단이 복귀하고, 감정이 돌아온다. 이건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생리의 문제다. 몸이 안전하다고 느낄 때, 비로소 자유는 다시 작동하기 시작한다.
나는 여전히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그 불자유 속에서도, 나는 살아 있다. 그리고 그 ‘살아 있음’ 자체가 자유의 가장 원초적 형태일지도 모른다. 병리 속의 존재는 선택하지 못해도 감각하고, 버티고, 지켜낸다. 그건 의지의 자유가 아니라 존재의 자유다. 즉, “살고자 하는 몸의 의지” 자체가 자유인 것이다.
나는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나는 자유를 포기할 수도 없다. 병리 이후의 나에게 자유란, 단순한 권리나 선택지가 아니라 존재 유지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 타인의 통제, 감정적 압박, 부당한 권위 — 그 모든 것은 내 신경계에게 “위험”이라는 신호로 읽힌다. 그래서 나는 자유롭지 않게, 그러나 오직 자유를 지키는 방향으로만 선택한다. 이건 역설이 아니라, 몸이 기억하고 있는 생존의 윤리다.
사람들은 “자유를 조금 양보하더라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나에겐 그 ‘양보’가 불가능하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신경계는 타인의 권위나 통제를 단순한 갈등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건 과거의 “완전한 무력화”의 재현이다. 한 번의 굴복이 단순한 불편함이 아니라 존재의 해체로 이어지는 걸 안다. 그렇기에 나는 타협 대신 침묵을 선택하고, 종종 “예민하다”거나 “완고하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건 반항이 아니라 자율의 방어다. 자유를 지키는 것은 나에게 생존과 같다.
트라우마의 본질은 통제의 상실이다. 그때의 공포는 신체 전체에 각인되어, 다시 누군가의 뜻에 종속될 때 신경계가 즉각 경보를 울린다. 그건 단순히 “싫다”의 감정이 아니라, “살 수 없다”의 신호다. 그래서 나는 타인의 권위를 정중히 거절하거나 조용히 관계를 끊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건 공격이 아니라, 존엄의 자기 방어다. 내 존엄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도 유지되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한 사람에게 자유는 추상적 개념일 수 있다. 하지만 병리를 경험한 나에게 자유는 철저히 신체적 감각의 문제다.
누군가가 나의 말을 끊을 때 → 신경계는 “통제당한다”고 판단한다.
누군가가 내 감정을 평가할 때 → “존재가 부정된다”는 신호가 켜진다.
누군가가 내 선택을 대신할 때 → 뇌는 ‘생존 불능 상태’로 들어간다.
이건 도덕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니다. 자유는 뇌와 신경의 레벨에서 이미 윤리적 판단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나는 이 신체적 윤리를 무시할 수 없다. 그건 내가 살아 있는 한, 내 안에서 작동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바다 위로 노을이 졌다. 빛의 농도가 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바람이 머리카락을 스친다. 나는 그 모든 걸 ‘예쁘다’고 인지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가슴이 벅차오르거나, 감탄이 터져 나오지는 않는다. 이유 없이 예쁜 걸 ‘아는’ 나와 그 아름다움에 ‘반응하지 않는’ 내가 나란히 서 있다.
예전 같으면 이런 풍경 앞에서 사진을 찍거나, 누군가에게 “여기 진짜 예쁘다”고 보냈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그럴 여유가 없다. 감탄이란, 사실 ‘안전하다는 감각’ 위에서만 자라는 감정이다. 신경계가 평화로울 때만, 뇌는 감각의 층을 통과해 감정의 층으로 넘어간다. 하지만 내 신경계는 늘 경계 상태에 있다. 조용한 바다조차 내게는 수많은 자극의 집합이다 — 빛, 냄새, 파도, 목소리, 온도. 그게 너무 많아 감탄할 틈이 없다. 그래서 나는 감탄하지 않는다. 아니, 감탄을 감당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감탄을 사치라 여긴다. 바쁘면 바쁜 대로 살고, 여유가 있을 때나 감탄하는 게 인생의 리듬이라 말한다. 하지만 나에게 감탄은 신경계의 회복 신호다. 감탄할 수 있다는 건 세상이 위험하지 않다는 뜻이고, 내가 지금 안전하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감탄하지 못하는 건 단순히 예민함 때문이 아니라 아직 세상이 완전히 안전하지 않다는 증거다.
나는 이제 감탄하려 애쓰지 않는다. 대신 관찰한다. “바다색이 회색에서 청색으로 변한다.”, “햇빛이 파도 끝을 따라 길게 미끄러진다.”, “바람이 이마에 닿는 방향이 조금 바뀌었다.” 감탄은 감정이지만, 관찰은 사고다. 그리고 사고는 나를 보호한다. 그렇게 천천히, 감정 없는 관찰이 쌓일 때 어느 날 문득 작은 감탄이 피어난다. 그건 인위적인 감정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허락한 회복의 증거다.
나는 더 이상 감탄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감각 자체가 이미 내 안의 생존이자 미학이다. 감탄이란 결국 몸이 다시 세상을 신뢰하기 시작했을 때 저절로 피어나는 감정일 것이다. 그날이 오면 나는 아마 이렇게 말하겠지. “나는 이제, 감탄이 다시 느껴진다.”
“예쁘다”는 말은 언제나 한 발 늦다. 그건 이미 세상을 해석한 뒤, 그 감각을 ‘나의 것’으로 환원한 언어다. 즉, ‘예쁘다’는 자아가 세계를 안전하게 다루는 방식이다. 감정이 아니라 판단, 파동이 아니라 문장이다. 그에 비해 감탄은 문장으로 변환되기 이전의 것, 몸이 먼저 터져 나오는 움직임이다. “와…” 혹은 “하…” 같은 숨의 소리. 정동(affect)은 바로 그 숨과 같다. 정동은 자아보다 먼저, 언어보다 앞서 있다. 우리가 세상과의 경계를 느슨하게 풀어버릴 때 그 경계 사이로 흘러드는 감각의 전류, 그게 바로 정동이다.
하지만 현대인은 감탄보다 판단에 익숙하다. 우리는 감정을 느끼기 전에 그 감정의 ‘맥락’을 먼저 분석하고, 그 맥락에 따라 허용하거나 억제한다. “지금 감탄해도 되나?”, “이건 과한 감정 표현 아닐까?” 그 사이 정동은 이미 자아의 필터에 걸려 사라진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일수록 이 경계가 더 단단하다. 감정은 위험하다는 신호로 각인되었고, 몸은 감탄을 ‘위기 상황’으로 착각한다. 그렇게 정동은 사라진다. 아니, 더 정확히는 정동은 감당되지 못해 봉인된다.
정동은 생각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감정의 복귀는 언제나 감각의 회복에서 시작된다. 감정은 “왜”라고 묻지만, 감각은 “지금”에 산다. 그래서 감탄을 되살리는 첫걸음은 ‘왜 아름다운가’가 아니라 ‘지금 어떤 감각이 들어오는가’를 느끼는 일이다. “빛이 따뜻하다.”, “소금기가 입술에 닿는다.”, “공기가 조금 차다.” 그건 언어 이전의 언어, 자아 이전의 나, 감정이 아직 해석되지 않은 순수한 신호다.
감탄이 다시 가능해진다는 건 내가 다시 세상을 신뢰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정동은 단지 감정의 복귀가 아니라, 존재의 복원이다. 우리가 세상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순간, 그건 세상이 나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뇌의 확신이 작동했다는 뜻이다. 감탄은 결국, 생존의 언어다. 감정이 아니라 생명 반응.
정동은 억지로 회복되지 않는다. 그건 몸이 안전하다고 믿을 때, 언어의 바깥에서 천천히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감탄을 배운 적이 없다. 다만 감탄을 다시 허락받았을 뿐이다.”
#생각번호2025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