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을 감지하는 신경계의 이야기
세상을 보면 이상한 장면이 많다. 착한 척하는 사람, 윤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브랜드, 정의로운 척하는 권력자. 그들의 말과 행동이 어긋나는 순간, 나는 단순히 짜증이 아니라 불쾌함과 긴장감을 동시에 느낀다. 마치 몸이 위험을 감지하듯이. 그 감각은 내가 CPTSD(복합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은 이후 더 강해졌다. 도덕의 문제라기보다, 신경계가 거짓과 위선을 생존의 위협으로 인식하는 구조가 된 것이다.
어릴 때의 외상은 단순히 기억으로 남지 않는다. 그건 신체의 기억으로 각인된다. “사랑한다”는 말과 “폭력적인 행동”이 동시에 일어나면, 뇌는 ‘언어는 믿을 수 없다’는 명제를 학습한다. 그래서 이후의 삶에서 말과 행동이 불일치하는 사람을 보면, 이성보다 편도체(위험 감지 센서)가 먼저 반응한다. 그건 분노가 아니라 공포에 가까운 반응이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몸은 이미 “그때 그 공기”를 기억해버린다.
다른 사람에게 위선은 불쾌한 모순이지만, 나에게는 신뢰가 무너졌던 순간들의 재현이다. 그건 단순한 판단이 아니라, “이 사람이 나를 다시 다치게 할 수도 있다”는 신경학적 경보다. 그래서 나는 위선을 보면 화가 나면서도, 한편으로는 몸이 굳고, 심장이 빨리 뛰고, 불안감이 올라온다. 위선은 도덕적 혐오이기 전에 트라우마적 기억의 재점화다.
한때 나는 이런 나를 ‘너무 예민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이건 망가진 감각이 아니라, 한때 나를 지켜주었던 정확한 감각의 흔적이라는 것을. 나는 타인의 언어 속에서 감정의 불일치, 미묘한 억양, 모순된 표정을 읽는다. 그건 상처의 부산물이지만, 동시에 진실을 감지하는 능력이다. 트라우마는 나를 망가뜨렸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세상의 위선을 탐지할 수 있는 감수성을 얻게 되었다.
회복의 과정은 위선을 참아내는 법이 아니다. 그건 불가능하다. 대신, “이 위선이 나를 다치게 하지는 않는다”는 걸 몸이 이해하도록 재학습하는 과정이다. 모든 위선이 폭력은 아니며, 모든 모순이 나를 위협하지는 않는다. 인간은 누구나 불완전하고, 그 불완전함 속에서도 관계는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이제 안다. 위선에 민감하다는 건 병이 아니라, 한때 거짓된 세상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만 살 수 있었던 신경계의 기억이라는 걸. 그 감각은 나를 괴롭히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정확하게 세상과 연결시킨다. 나는 예민한 사람이 아니다. 나는 진실에 반응하는 사람이다.
#생각번호20251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