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 피해자가 모두 범죄자가 되지는 않는

그리고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정책을 말해야 하는 이유

by 민진성 mola mola

아동학대를 다룰 때 사람들은 종종 두 가지 극단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학대 피해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보는 건 낙인 아닌가?”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그렇다면 그들의 취약성을 사회가 어떻게 다뤄야 할까?”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최근 조현병·폭력 사건·트라우마 연구를 읽다 보면 두 질문 모두 단순히 ‘옳다/그르다’로 나눌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된다.



학대 피해자는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다

이 문장은 분명히 말해야 한다. 데이터는 학대 피해자를 범죄 취약군 전체로 보지 않는다. 학대를 겪은 사람들의 다수는 오히려 지나칠 만큼 타인에게 조심스럽고, 관계에서 과수용성을 보이며, 폭력과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살아간다. “상처를 경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잠재적 위험성을 언급하는 건 과학적 사실에도 맞지 않고, 윤리적으로도 위험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떤 사건 앞에서 “혹시 학대 때문이었을까?”라고 묻게 된다. 이 질문이 나쁜 건 아니다. 문제는 그 질문의 방향이다.



문제는 ‘학대’ 자체가 아니라, 학대 + 고립 + 실패 + 치료 공백의 조합이다

학대는 한 개인의 삶에 깊게 스며드는 상처다. 하지만 그 상처가 폭력으로 향하는 길은 극히 드물고, 그 길은 언제나 “다른 것들”과 함께 나타난다.

반복적이고 장기적인 아동기 학대

주양육자에 의한 학대

다중 형태의 트라우마

이후에도 지속된 스트레스

사회적 고립

경제적 위기

조기치료 기회의 상실

청소년기부터의 학교·관계 단절

약물·음주 문제

이 조건들이 모두 겹쳐진 좁은 지점에서만 일부 개인의 삶이 폭력의 방향으로 흐른다. 이 지점이 중요하다. 학대 피해자 = 잠재적 가해자가 아니라 학대 + 사회적 실패의 누적 = 취약군이다. 우리가 정책적으로 말해야 하는 건 바로 이 두 번째 방정식이다.



그러니까 정책은 ‘낙인’이 아니라 ‘예방’이다

학대 피해자 전체를 위험군으로 분류하려는 정책은 실패한다. 그것은 사실과도 맞지 않고, 사람을 상처만으로 규정하는 태도로 이어진다. 정책이 해야 하는 일은 딱 하나다. 취약성이 높은 환경을 조기에 발견하고, 그들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사회적 지지대를 세우는 것. 이건 그들을 ‘관리’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곧 우리 모두의 안전을 지키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범죄 예방은 처벌 강화가 아니라 “무너지는 순간을 일찍 붙잡는 것”에서 시작된다.



우리가 실제로 해야 할 일들

1) 아동기 조기 개입

학대 신고 가정 1–3년 추적

피해 아동 치료비 국가 전액 지원

양육자 교육 프로그램

가족 재구성·분리 보호 결정 강화


2) 학대 경험이 있는 청소년·성인의 회복 프로그램

CPTSD 전문치료

관계·정서능력 재훈련

주거·경제 지원

정신건강센터–복지·고용 연결 시스템


3) 조현병 등 주요 정신질환의 조기 발견

고립·학업단절·위기 신호를 지역 사회가 먼저 포착

치료 공백을 줄이는 시스템

치료 지속을 위한 주거·경제 지원


4) 지역사회 기반 지원

멘토링

보호관찰 대신 심리재활

가족치료

지지집단·쉼터

이 모든 구조는 “학대 피해자를 의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삶이 다시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해, 그리고 그 무너짐이 사회 전체의 안전으로 번지지 않게 하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말해야 한다

학대 피해자를 위험군으로 규정하는 순간, 우리는 그들이 살아온 고통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취약성이 높은 집단에 대해 사회적 안전망과 회복적 정책을 말하는 것은 낙인이 아니라 책임이다. 사회 전체의 안전은 소수의 악의가 아니라 방치된 취약성에서 무너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해야 한다. 학대 피해자가 아니라, 학대가 만든 취약성을 그대로 두는 사회가 더 위험하다고. 정책은 그들을 통제하는 언어가 아니라, 그들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손이어야 한다.




#생각번호2025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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