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권분립이 흔들릴 때, 우리는 왜 침묵하는가
5.18 광주민주화운동부터 6월 항쟁까지, 한국 현대사는 독재를 견디지 않겠다는 집단적 몸부림의 기록이다. 그러나 오늘날, 더 이상 전두환과 같은 군사정권형 독재자는 존재하지 않음에도, 기묘한 불균형이 다시금 민주주의의 구조를 뒤흔들고 있다. 삼권분립은 민주주의의 최소 조건이다. 행정, 입법, 사법은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추는 데 그 본질이 있다. 하지만 최근 대한민국 정치에서는 다수당의 입법 권력을 기반으로 행정부와 사법부를 제약하고, 심지어 해체에 가까운 개혁을 시도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이에 대해 우리는 진지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한국은 '형식적 1인 독재'에만 예민하다. 군복을 입고 총칼로 정권을 잡은 이들에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의회 권력을 기반으로 다수의 힘을 이용해 시스템을 유린하는 행위에는 비교적 관대하다. 다수당의 입법 독점이 사실상 다른 두 권력(사법과 행정)을 무력화시키는 수준에 이르러도, 사람들은 “그래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수당인데”라며 체념하거나 무시한다. 하지만 이건 민주주의의 역설이다. 다수의 이름으로 소수를 억압하고, 제도 그 자체를 구조적으로 훼손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형태만 다른 독재일 뿐이다.
관료제는 어디에나 개혁이 필요하다. 그러나 검찰이 개혁의 중심 타깃이 된 배경은, 정치권력의 수사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이는 매우 아이러니한 구조다. 조국 전 장관의 사건은 상징적이다. 당시 검찰은 정권 실세를 수사하며 엄청난 반발을 맞았고, 이후 수사권 분리와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의 흐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조국 전 장관은 실제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게 말해주는 바는 무엇인가? 검찰이 지나친 수사를 했을 수는 있지만, 동시에 적법한 수사를 통해 유의미한 결과를 도출했다는 점도 인정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되묻는다. 개혁의 1순위는 오히려 정치 권력을 가지는 행정부와 입법부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현실 정치는 표의 싸움이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다수당이 국회 과반수를 넘어 개헌선까지 확보하게 되면, 대통령의 거부권조차 무의미해진다. 심지어 헌법 개정이나 사법부 인사에까지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럴 때, 민주주의는 오히려 자가당착에 빠진다. 우리는 표로서 이들을 뽑았지만, 그들이 구조 전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이는 "투표만 잘하면 된다"는 민주주의의 허술한 신화를 드러낸다. 균형을 잡는 건 제도 이전에 유권자의 감각이어야 한다.
보수주의자들이 ‘자유’를 강조하면서도 독재를 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실, 정치 스펙트럼에서 보수와 독재는 반드시 분리되지 않는다. 보수주의는 '질서'와 '안정', '위계'를 중시하며, 때로는 자유보다 전통과 권위를 우선시하기도 한다. 이런 성향이 위기 상황에서는 강한 리더십과 통제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발현된다. 즉, 자유를 수단으로 말하지만, 궁극적 목표가 '기득권의 보존'이라면 그 자유는 보호막이 아니라 방패가 된다. 마찬가지로 진보 진영 또한 '정의'와 '평등'이라는 이상을 이유로 절차적 정당성을 훼손할 수 있다. 결국, 진영을 막론하고 모든 권력은 독재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정치에 있어 이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조적 감각이다. 우리는 종종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의 싸움에 매몰되지만, 본질은 권력이 시스템을 훼손하고 있는가 아닌가이다. 삼권분립, 권력 분산, 제도적 균형은 특정 진영의 문제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생존 조건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형식적 민주주의 속에서 구조적 독재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그리고 그 배경에는, 이 모든 구조를 허용한 유권자의 무감각이 있다.
민주주의는 제도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가장 중요한 건 국민의 시민의식이다. 투표는 제도의 시작일 뿐, 그것을 어떻게 감시하고 책임을 묻는가가 민주주의의 완성이다. 다수의 권력에 무관심하거나 무비판적으로 동의하는 시민은, 의도치 않게 독재의 탄생을 허용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과거를 다시 반복한다.
"절차는 있었지만, 민주주의는 없었다"고.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