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해방론자들이 빠진 윤리의 역설
쥬라기월드 같은 영화를 보면 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눈앞의 포악한 공룡을 구해야 한다고 외치는 사람. 그는 대개 “생명의 존엄”, “동물의 권리” 같은 말을 한다. 그리고 관객은 묘하게 찝찝함을 느낀다. “지금은 그 공룡보다 사람이 먼저 아닌가?”라는 감각. 이건 영화 속 얘기만은 아니다. 현실에도 존재한다. 실험용 쥐 한 마리의 고통을 근거로 백신 개발을 중단하라 하고, 가난한 나라의 생계형 수렵을 ‘동물학대’라 비판하는 사람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인간은 언제부터 ‘구조자’였을까? 무엇을 근거로 ‘이 존재는 구해야 할 만큼 소중하다’고 판단하게 되었을까?
동물해방론자들은 인간중심주의를 거부한다. 그들에게 인간은 더 이상 특별하지 않다. 고통을 느끼는 생명이라면, 종(種)에 관계없이 도덕적 고려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은가? 그 도덕적 고려는 결국 인간이 만든 언어, 인간이 정한 윤리, 인간이 설정한 권리 기준을 따른다. 다시 말해, 인간은 여전히 중심에 있다. 다만 이번엔 “지배자”가 아니라 “구조자”라는 이름으로. 여기서 묻고 싶다. “동물을 인간과 동등하게 여긴다”는 말은 정말 그 존재를 이해한 결과인가? 아니면 여전히 인간이 스스로 만든 가치 틀 속에 타자를 끌어들이는 행위인가?
“동물도 고통을 느낀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 고통을 ‘도덕적 판단의 근거’로 삼는 것은, 전적으로 인간의 해석이다. 우리는 그 고통의 양을 수치화할 수도 없고, 그 감각을 공유할 수도 없다. 사람 조차도 동일한 조건에서 느끼는 고통의 양이 다르고 누군가의 극심한 고통 상황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고통이 없는 상황일 수도 있다. 결국 “동물의 고통도 인간처럼 존중받아야 해”라는 주장은 “인간이 경험한 고통의 잣대로 동물을 해석한다”는 뜻이 된다. 결국 동물의 입장이 아니라, 동물을 인간화시킨 인간의 입장이다.
나는 생명을 경시하고 싶은 게 아니다. 하지만 인간이 모든 존재의 고통을 재단하고, 구제하고, 권리를 부여할 수 있다는 전제에는 심각한 위계 의식이 숨어 있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윤리 안에서 다른 존재를 끌어안으려 하지만, 그 끌어안음조차 하나의 지배 방식일 수 있다. 생명을 보호하자는 말이 어쩌면 그 생명을 누가 보호할지 정하는 권력의 선언일 수 있다는 사실. 동물해방론자들은 이 지점을 너무 쉽게 넘긴다.
"우리는 동물을 대신해서 말한다"고 말할 때, 그 안엔 거대한 전제가 있다. 우리는 대신해도 된다. 우리는 판단해도 된다. 우리는 구할 수 있다. 이 모든 말은, 사실상 “우리는 위에 있다”는 선언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비판한 인간중심주의의 다른 얼굴이다.
나는 동물 보호를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수성은 문명이 발전해온 증거라고 생각한다. 다만 어떤 생명도, 어떤 고통도, 인간의 손으로 계량되고 정당화되고 위계화되는 그 순간부터 그건 보호가 아니라 구조된 자와 구조자의 권력 구조가 된다. 동등함은 위로부터 선포될 수 없다. 진짜 동등함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통제하려 하지 않을 때에만 가능하다. 동물해방이란 이름으로, 우리는 또 다른 인간의 얼굴을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