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보호의 진짜 기준은 도덕일까, 취향일까
멸종위기종을 보호해야 한다는 말은 누구에게나 선하게 들린다. 하지만 그 안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귀엽고 예쁜 동물일수록 살아남을 확률이 높다는 것. 우리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멸종위기종—판다, 북극곰, 코알라, 해달—이 모두 크고 둥글며 인간적인 인상을 지닌 건 우연이 아니다. 이른바 ‘카리스마 동물(Charismatic megafauna)’ 편향이다. 이 단어는 실제 학계에서도 쓰이는 용어다. 인간의 정서에 잘 호소하는 동물에게 자금, 연구, 언론의 관심이 몰린다는 뜻이다.
영국 가디언의 2025년 보도에 따르면, 전 세계 보존 기금의 82.9%는 척추동물에, 단 6.6%만이 식물과 무척추동물에 투입된다. 그 중에서도 85%는 조류와 포유류, 양서류는 고작 2.8%의 기금만 받는다. 포유류는 평균 17편의 논문, 조류는 8편, 어류는 5편, 무척추동물은 1편도 채 되지 않는다. 심지어 미어캣은 100건 넘는 연구가 이뤄진 반면, 매너티(바다소)는 14건에 불과하다. 이 모든 수치는 한 가지를 말한다.
생명의 가치가 아니라, 정서적 호감도가 자원의 흐름을 좌우한다는 것.
동물해방론자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고통을 느끼는 존재는 도덕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 보호를 받는 기준은 고통이 아니라 감정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감정이입할 수 있는 외모”가 도덕적 선택을 좌우한다. 그래서 우리는 판다의 울음에는 후원금을 보내면서, 심해에서 조용히 멸종하는 바다벌레에 대해서는 모른 척 한다. 그것이 윤리일까? 아니면 취향일까?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는 말은 예쁘게 들린다. 하지만 그 말이 진심이라면, 왜 어떤 생명은 구조되고 어떤 생명은 버려지는가? 결국 이 구조는 이렇게 요약된다. 미모가 도덕을 유리하게 만든다. 보호받는 생명은 선택된 생명이다. 그 선택의 권한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이것이 ‘보호라는 이름의 권력’이다. 앞선 글에서 말했듯, “동물과 인간을 동등하게 본다”는 말조차 인간이 정한 잣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다. 동물을 대상화하지 않겠다며, 또 다른 방식으로 대상화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동물을 사랑할 수 있다. 그 감정이 시작일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감정이 곧 도덕의 기준이 된다면, 윤리는 결국 감정의 전시장이 된다. 그때 우리는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감동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진짜 윤리는, 미학 이전의 판단이다. 사랑스럽지 않아도 지켜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 귀엽지 않아도 그 존재가 가진 생태적 고유함을 존중할 수 있는 태도. 그때서야 비로소 보호는 취향이 아니라 윤리가 될 수 있다.
귀여운 생명이 구조받고, 그렇지 않은 생명은 조용히 사라진다. 이것이 생명 존중의 미래라면, 우리는 윤리라는 말을 너무 쉽게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를 구조할지 결정하는 자가 된 순간, 우리는 여전히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아닐까.
#202507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