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약자를 자처하는가

‘약자’를 자산화하는 시대에 대하여

by 민진성 mola mola

나는 왜 당혹스러웠는가

어느 날, 누군가가 스스로를 약자라 말했다. 여성으로서, 억압을 받아왔고 세상은 여전히 불공정하다고 주장했다. 그 말은 분명 똑똑했고, 단호했으며, 정당해 보였다. 하지만 내가 아는 그의 삶은 달랐다. 그는 매력적인 외모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고, 소수만이 진입 가능한 교육 시스템을 밟아왔으며, 언제나 타인의 호의 속에 있었다. 그 말은 맞을지 몰라도, 그 말의 자리는 낯설었다. 그의 위치와 말의 위치가 어긋나 있었다.



특권의 조합, 그리고 서사의 착취

외모만으로 강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외모, 경제력, 교육, 문화자본이 결합된 존재는 분명히 이 사회가 ‘우대하는 구조’의 중심에 있다. 그런 사람이 “나는 억압받은 여성”이라 말하며 보편적 차별의 서사를 대변하려 할 때,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진짜 그 자리에 있었는가? 아니면 그 자리에 기대어 정당성을 가져간 것뿐인가?"



피해를 말하는 자와 피해의 자리를 점유하는 자

그가 말하는 차별은, 어쩌면 ‘불편함’이나 ‘불쾌함’의 감정일 수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응시되는 위치 자체가 보호와 선택의 대상이었다면, 그 감정은 억압이 아니라 "권력 안에서의 불편함"일 뿐이다. 그걸 단순히 “차별”이라 부르고, 모든 여성의 고통과 같은 층위로 말한다면 그건 누군가의 더 깊고 오래된 침묵을 위에서 덮어씌우는 일이 된다.



약자 정체성 자처에 대한 비판

여성이라는 특정 집단에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실질적인 사회경제적 강자임에도 불구하고 약자 정치를 통해 자신을 '피해자'로 내면화하려는 태도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이는 자신이 누리는 외모, 경제력, 학력, 문화자본 등 다양한 특권을 외면한 채, 보편적인 차별의 서사를 자신에게 유리하게 가져가는 행위다.


더 나아가 이러한 현상은 성별이라는 렌즈를 넘어, 사회적 소수자나 피해자라는 정체성이 '자산화'될 수 있는 모든 영역에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학력 고소득층이 환경 문제나 특정 사회 운동의 '가장 큰 피해자'임을 자처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하거나, 역사적 피해 집단의 후손임을 내세워 현재의 개인적 이득을 정당화하는 경우 등이 이에 해당한다.


문제는 이러한 '약자 자처'가 실제로 고통받는 이들의 서사를 희석시키고, 그들의 목소리를 가로챈다는 점이다. 강자가 약자의 자리를 점유하려 할 때, 진정한 약자들은 오히려 발언권을 잃고 침묵하게 된다. 이는 연대가 아닌 윤리의 사칭이며, 사회적 자원의 배분과 문제 해결의 우선순위를 왜곡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는 개인이 속한 집단적 정체성뿐 아니라, 그 개인이 실제로 누리는 다층적인 특권과 위치를 함께 자각하고 책임 있는 발언을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연대와 윤리가 가능함을 기억해야 한다.




진짜 연대는 위치의 자각에서 시작된다

진정한 연대는 “우리 모두 억압받았다”는 선언이 아니라, “나는 이런 자리에 있었고, 그래서 내가 겪은 건 이런 종류의 불편함이었다”라는 고백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말은 말하는 자의 위치에 따라 도덕적 무게도, 설득력도 달라진다. 자신이 강자의 자리에 있음에도 그걸 은폐한 채 약자를 자처하려 한다면, 그건 연대가 아니라 윤리의 사칭이다.


나는 누구의 고통도 비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그 고통이 말로써 대표성을 가질 때, 그 말은 책임을 가져야 한다. 매력, 경제력, 교육, 문화 자본이 모두 그를 감싸고 있었고, 사회는 그를 ‘선택받은 자’로 대했다. 그럼에도 스스로를 약자라 말하며 이 사회의 도덕적 우위를 점하려는 말은 나에게 당혹감으로 다가왔다. 진짜 연대는, 진짜 윤리는, 내가 서 있던 자리를 인식한 말에서 시작된다. 그걸 모른 채 “우리 모두 억압받았다”고 말하는 순간, 애써 자처하지 않아도 고통 받고 있는 누군가는 또다시 말할 기회를 빼앗긴다.




#2025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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