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으로의 한 걸음

나는 오늘도 살아서 집에 돌아왔다.

by 민진성 mola mola

여느 날 같이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불이 난 건가. 갑자기 주변이 흐릿하게 보여지기 시작했다. 누군가 공장이나 창고에서 무엇을 태우는 것인지, 누구네 집에 불이 난 것인지 연기가 뿌옇게 시야를 가렸다. 불이 난 근원지를 찾기 위해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주변이 이상하리만큼 평화로울 뿐이었다. 문득 깨달았다. 눈이나 코가 전혀 맵지 않았다. 그저 내 시야만 뿌옇게 보일 뿐이었다. 덜컥 놀랐다. 눈을 아무리 감았다 떠보거나 고개를 저어봐도 시야가 더 뿌옇게 보일 뿐이었다. 제자리에 멈춰서 119를 불러야 하나 싶은 순간 다시 시야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무엇이었을까?

의아했지만 3~5분 내로 제대로 돌아왔으니 괜찮은가보다 하고 길을 마저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엔 누군가 내 머리를 위쪽에서 망치로 때린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내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망치로 얻어맞을 만큼 잘못을 한 적도 없다. 나한테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스트레스성 과호흡 혹은 교감신경 항진

복합외상후스트레스장애(이하 CPSTD;Complex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에서 흔히 나타나는 반응 중 하나로 스트레스성 과호흡 혹은 교감신경 항진이 있다. 불안하거나 스트레스 상황일 때, 호흡이 얕고 빠르게 되면 이산화탄소 농도가 급감하면서 시야 흐림이 동반될 수 있다. 이때는 이인감(비현실감)이나 해리증상이 같이 오는 경우가 있다.

내가 cptsd가 있는 것은 맞지만, 과호흡이 오지도 않았고 딱히 이인감인지는 잘 모르겠다. 물론 뿌옇게 보이는 거 자체가 '비현실'이라면 이인감이나 해리증상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이인감이나 해리와는 다른 형태였다.


자율신경계 불균형/신체화 증상

특히 CPTSD에서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다. 뇌-자율신경계 간 연결 이상으로 인해 심장, 혈압, 시야, 균형 감각 등에 간헐적인 이상을 일으킨다. 산책 중 무력감, 해리, 통증이 결합된 순간이라면 이 범주일 가능성이 높다.


편두통 전조 증상(시각 이상, arua)

머리가 아프기 전에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경우, 편두통 전조일 수 있다. 마치 물 속에서 보는 듯한 시야, 깜빡임, 눈 앞에 흐릿한 그림자 느낌이 나타난다. '머리를 망치로 맞는 듯한 느낌'이 편두통 특유의 두개골 중심 통증일 가능성이 있다.

나의 경우에는 물 속이 아니라 연기 속에서 보는 듯한 시야인데 이에 해당할 수도 있겠다.


긴장성 두통 또는 심리적/신체화 반응

스트레스나 과도한 긴장이 정수리 근처까지 영향을 주면 '쾅'치는 듯한 압박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CPTSD 상태에서 갑작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자극(소리, 공간, 생각)에 몸이 방어 반응을 하면서 머리로 통증이 오는 경우가 많다.


번개형(Primary Stabbing) 두통

정말 이름처럼 '찌릿' 또는 '쾅' 한 번 통증이 온 뒤 사라지는 두통을 말한다. 정수리 부근(두정부)이나 뒷통수에 갑자기 생기는 경우가 많고, 몇 초~ 몇 분 내에 사라지는 게 특징이다. 원인은 명확하지 않지만 신경 과민 상태, 수면 부족, 스트레스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실제로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은 통증은 순간적으로 깜짝 놀랄 만큼 아팠지만, 금방 사라졌다.


자율신경계 불균형/스트레스성 신체화 반응

CPTSD에서는 자율신경계가 실제 위협이 없음에도 경보를 울리는 상태가 반복되곤 한다. 이때 두정부(정수리 부근)로 혈류가 급격히 몰리거나 빠지면서 압박 혹은 타격감이 올 수 있다.

특히 시야가 뿌옇게 된 뒤 이런 통증이 나타났다면, 몸 전체가 Fight-or-Flight(투쟁-도피 반응; 싸우거나 도망치거나 반응) 모드에서 자동복귀과정이었을 수 있다.



종합적으로 고려해볼 때, 스트레스성 자율신경 반응과 번개형 두통이 복합적으로 나타난 현상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몸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외부 위협을 감지했다고 오인하고, 그 위협이 생명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수준의 ‘외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발생한 반응이다. 그 결과, 자율신경계가 과도하게 활성화되며 시야가 흐려지고 정수리 부위에 타격감 있는 통증이 나타난 것이다.

요컨대, 지속적인 긴장 상태로 인한 자율신경계 이상 반응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감정의 이중구조

중요한 것은, 막상 그렇게 산책을 하고 돌아와 씻고 방에 들어오면 뿌듯하고 나른하며 안심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산책 과정에서 실질적은 위협은 없었고, 생명의 위협이 없었다는 것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점차 부교감신경계을 활성(안정화)한다. 산책 도중에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각성 상태, 산책 후에는 '살아남았다'는 평온과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무서워하던 상황을 마주했지만, 결국 나는 살아돌아왔다"는 노출치료의 양상과 유사하다.



산책을 시작한 이유에 아주 적합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과각성과 타인의 시선에 대한 예민함, 나를 쓸모없는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라는 공포감 때문에 집밖을 나서는 일이나 타인과 교류하는 것에 큰 어려움을 느끼고 있다. 이걸 극복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약만 먹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꾸준한 노출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당장은 사람과의 교류까지는 자신이 없어 산책을 택한 것이다. 일주일 동안 매일 12,000보 이상, 1~2시간 정도 산책을 한다. 그 과정에서 나는 과각성 되고 스트레스를 받으며 자율신경계 이상으로 인한 '이상한' 증상들을 겪곤 한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살아서 집에 돌아오고 부교감신경계가 활성화되면서 산책하는 일이, 밖을 나서는 일이 그리 위험하지만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체험한다.


앞으로도 나는 수없이 연기 속에 갇히거나 누군가에게 얻어맞는 듯이 아픈 일을 겪을 수 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살아서 집에 돌아올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는 바깥 세계와 더욱 더 가까워질 것이다. 일상과 사회로의 회복에 한 걸음씩 내딛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매일 12,000보를 걷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게 매일 한 걸음씩 일상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생각번호2025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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