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잔인하게 찬란했던

by 민진성 mola mola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 세상 모두가 망해버렸으면 했던 날 말이다. 그 누구도 웃음 짓지 않고,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고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았으면 좋겠는 그런 날들이 있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소름이 돋고 화창한 날씨가 증오스러운, 밝게 웃음짓는 이들이 미치도록 부럽고 싫은 그런 날들이 있었다. 나는 벚꽃을 보면 그런 날들이 떠오른다.



그곳은 참 찬란했다.

나는 재수를 해서 동국대학교에 입학했었다. 이후 수능을 한 번 더 치르고 연세대학교로 소속을 옮겼지만, 동국대학교를 한 학기동안 다녔다. 동국대학교는 남산 바로 밑자락에 있는 대학교다. 그래서 대학 내 고도제한이 있어 높은 건물이 들어오거나 재건축하여 고도를 높일 수 없고, 교내 중앙도서관에서는 남산과 남산타워를 함께 바라보며 책을 읽을 수 있는 환상적인 자리도 있다. 불교학교인지라 교양필수로 명상수업도 들어 있고, 교내에 정각원이라는 사찰도 있다. 그만큼 자연과 맞닿아 있고 평화로운 곳이다. 교내에는 나무들이 참 많은데 특히 봄에는 벚꽃들이 찬란하게도 핀다. 특히 혜화관과 만해관 혹은 법학관 사이에 있는 길에는 양쪽으로 벚꽃이 피어 지나가면서 보면 참 예쁘다.



그런 날들이었다.

매일을 울며 지냈다. 사람들에게 잘 다가서지 못했다. 동국대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래도 관성대로 사람들과 잘 지내보고 싶어서 과방에도 자주 가보려고 애쓰곤 했다. 하지만 가도 말이 잘 꺼내지지 않았다. 나는 더이상 사람을 믿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더이상 다가갈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냥 자리만 차지하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의 자상함에 경계를 하게 되고, 그들과 친해지고 싶었지만 가까워지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대체로 입을 다물고 살았다. 그나마 수업 중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피드백도 하곤 했지만 수업이 끝나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문득, 그렇게라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때쯤 과방의 문을 여는 것조차 두려워졌다. 과방의 문 앞에 한참을 서서 기다린 적도 있었다. 이 문을 내가 열 자신이 없으니 누군가 열어줬으면 하는 바람 말이다. 그러다 누군가 그 문을 열고 나오거나 들어가면 그 틈 사이로 비집고 들어갔다. 아무도 그 문을 열어주지 않는 날에는, 그냥 한참을 멍하니 서있다 그 문을 끝내 열지 못하고 돌아서 가곤 했다. 그때부터 밥도 혼자 먹고 수업도 혼자 들으러 다녔다. 어차피 나의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고,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내가 머물던 곳 근처에는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래서 공강이거나 수업을 마치고 방에 앉아 있으면 창문 밖으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 들어오곤 했다. 끔찍했다. 저 웃음소리가. 너무 밝고 더이상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생각에 무섭기까지 했다. 머물던 곳 근처에는 공원도 있었는데, 참 꽃이 예쁘게 피어 있었고 나무도 울창하니 눈이 시원했다. 눈이 너무 시려서 눈물이 자꾸 날 정도로. 마치 누군가 나의 눈을 찌르기라도 하는양 너무 아팠다. 진짜 아팠다. 비유적인 표현이 아니라. 이제와서야 안다. 그것이 신체화증상이라는 것을. 그때는 그냥 내가 미친 줄 알았다.(아, 포괄적인 의미에서 미쳤던 것도 맞다. 지금도 그렇고.) 그래서 그 해 봄은 늘 바닥을 보고 다녔다. 울면서 길을 걷는 것은 너무 꼴사나우니까. 그러다가 혹시라도 누군가 말이라도 걸면 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말이 없으니까.



그런 날이었다.

세상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날이었다. 하필 나는 혜화관에서 수업을 듣고 다음 수업으로 만해관 혹은 법학관으로 건너가야 했다. 양쪽으로 벚꽃이 피어 있는 길을 걸어가야 했다. 꼴사납게 울 순 없었다. 그래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길을 지나고 있었는데 누군가 나를 불러세웠다. 이 길의 벚꽃이 너무나 아름다운데, 혹시 이 아름다운 세상을 배경으로 자신의 사진을 찍어줄 수 없겠냐는 요청을 받았다.


싫었다. 끔찍했다. 내가 저 아름다운 것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나는 이토록 절망스러운데, 나몰라라 그저 찬란하기만 한 이 세상이. 그리고 그 세상을 배경으로 활착 웃어보이는 교수님으로 추정되는 저 중년 남성의 웃음이. 하지만 명분이 없었고, 또 거부할 줄 몰랐다. 거부하는 법을 배우진 못했다. 그래서 찍어드리기로 했다. 그때 제대로 마주했다. 받아든 핸드폰의 카메라 앵글을 통해 찬란한 세상이 나의 눈에 담겼다. 마치 세상을 축복이라도 하듯 만개한 벚꽃, 이 길을 지나는 이들에게 세례라도 하듯 흩날리는 꽃잎, 그리고 이 아름다운 세상과 너무나도 잘 어울리는 중년 남성의 행복한 웃음.


역겨웠다. 끔찍했다. 싫었다. 증오스러웠다. 저 웃음을 망가트리고 싶었다. 저 꽃잎들이 다 시들어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충동들이 몰려오자 구토감이 몰려왔다. 얼른 몇 컷을 찍어드리고 핸드폰을 돌려드린 후 법학관의 화장실로 뛰어들어갔다. 토를 했다. 울었다. 또 토를 했다. 또 울었다. 때로는 토를 하면서 울기도 했다. 역겨웠다. 그 역겨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이었나. 이 아름다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아니면 이 아름다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나라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인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한참을 숨죽여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정리를 한 후 밖으로 나와보니 내가 들었어야 했던 수업은 다 끝나 있었고 화창했던 푸른 날은 뉘엿뉘엿 지는 노을을 뒤로 오렌지 빛깔로 가득해 있었다. 잔뜩 지친 채로 터덜거리며 다시 내가 머물던 곳으로 돌아갔다.



시한폭탄들

우리는 종종 뉴스나 기사를 통해 묻지마 범죄, 무차별 살인 등의 사건을 마주하곤 한다. 그들의 논리는 이 사회가 싫다거나 여자가 싫다거나, 남자가 싫다거나 부자가 싫다거나 행복한 이들이 싫다는 것에 있다. 물론, 그들의 논리가 어쨌건 그들은 범죄자고 처벌 받아 마땅하다. 아니? 때론 법이 정하는 처벌이 그들의 죄에 비해 너무 가볍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서 이것에 대해 논하진 않겠다.


그들이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뭐, 그 중 몇몇은 그렇게 타고난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절대 다수는 그렇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의 논리와 심리가 벚꽃 피던 그 시절 나의 그것들과 무엇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가. 냉정하게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들도 그냥 사회에 혹은 어떤 사람에게 다친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그냥 그런 '다침'에 대한 취약성이 약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나는 무엇이 다른가. 무엇이 다르기에 나는 이곳에서 살고 그들은 용서받지 못할 범죄를 저지른 것인가. 폭력성? 도덕성? 윤리의식? 타고난 성향?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폭력성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들은 타인을 해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휘둘렀지만 나는 나를 해하는 방식으로 폭력을 휘두를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스스로를 해치는 이들과 무엇이 다른가. 어쩌면 그냥 단순히 겁이 좀 더 많은 것 뿐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얕은 자살충동과 얕은 자해충동을 가지고 그냥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동안 피가 날 때까지 몸을 긁으면서 말이다.



나와 다르지 않다면

타인을 해하는 이들, 스스로를 해하는 이들 모두 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면 사실 그들은 사회적으로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은 공적이든 사적이든 사회가 상처입힌 이들이다. 그들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는 구조, 상처를 받았더라도 회복할 수 있는 구조, 더 나아가 상처를 받아도 회복할 수 있는 능력 자체를 기를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대부분 이 기능은 가족이 수행한다. 하지만 슬프게도, 또 잔인하게도 모든 가족이 제 기능을 수행하지는 않는다. 그런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애초에 상처도 잘 받는데, 상처가 잘 낫지도 않는다. 어쩌면 상처를 치료하거나 관리하는 방법 자체를 알지 못해 덧나고 곪아 더 큰 상처나 질병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범죄와 극단적 선택이다. 가족이 모두 제 기능을 수행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 그렇지 않는다면 사회가, 국가가 이 기능을 보조해줄 수는 없을까? 이에 대한 고민은 나만 한 것이 아니며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다. 묻지마 범죄가 이슈가 될 때마다 거론되는 이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그 사건에 분노하고 또 금세 잊어버릴 뿐이다. 그러는 동안 또 어떤 아이는 잔뜩 곪은 상처를 가지고 어른이 된다.



잔인하게도 찬란한

이 세상은 퍽 아름다운 구석이 있다.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신뢰하는 그런 모습들 말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참 잔인하다. 너무나 찬란해서 갖고 싶은데 나는 가져본 적도 없고, 어떻게 갖을 수 있는지 그 방법 조차 알지 못한다. 혹자는 내가 갖지 못하는 것에 대해 분노하여 그것을 망치고자 하고 혹자는 내가 갖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여 삶을 포기한다. 그리고 또 혹자는 스스로를 자책하며 어떻게든 가져보자고 애쓴다. 하지만 되려 그 애씀이 그것을 가질 기회를 더 멀리 가게 만든다. 그래서 사랑, 신뢰 따위는 정말 짜증난다. 잔인하게도 너무나 찬란하기 때문에.



#생각번호2025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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