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악의 - 히가시노 게이고

[병아리 인사이트]

by 어금니
'왜'를 쫓는다는 것

매 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 그의 소설 중 다섯 번째로 읽게 된 책, '악의'. 역시나 이번에도 입을 떡 벌어지게 만들었다. 사건, 범인, 살해 방법, 트릭, 숨겨진 사연 등 추리소설에서 독자들 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요소들 중에서 이 책은 '동기'에 주목한다.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였는지'보다 '왜 죽였는지'에 초점이 맞춰져 흘러간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내가 지금까지 접해본 바로는 보편적으로 드라마, 영화, 소설 등의 픽션이 들어간 '창작물'은 '무엇'을 중심으로 진행되어 왔다. 이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이것이 해결되면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결국 어떻게 끝나게 되는지. 시청자와 독자들이 보면서 계속 궁금해하는 점은 '뭐가 어떻게 되는지'다.

그다음에 온 흐름은 '누가'에 집중하는 것. 신선한 전개와 위트 있는 조각들, 따뜻한 일상들을 담아내며 시청자가 그 시절을 추억하게 만들었던 '응답하라' 시리즈에서는 극을 이끌어가는 가장 기본적인 틀이 '누가 여주인공의 남편이 될 것인가?'였다. 매 화가 끝나면 수많은 댓글들이 어남택과 어남류, 쓰레기냐 칠봉이냐를 외치며, 그 회차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다 '그래서 결국 남편이 누구냐'를 판단하고 겨루는 것이 중심이었다. 웹툰이나 웹드라마에서도 이런 흐름이 종종 보인다. 회차마다 '누구 파는 손을 들어 일어나 주세요', '누구누구 주식 난 못 잃어' 등 저마다 엔딩의 주인공을 각자 응원하거나,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빼박 누구일 듯', '저번 화에서 아무개가 이렇게 했으니 범인은 걔 아니야?' 등 '누구'에집중한다.

추리소설은 이 두 가지에 모두 집중하게 되는 장르다. 여러 용의자들 사이에서 누가 범인일지, 어떻게 범행을 저지르고 교묘하게 숨겼는지를 계속 쫓아가며 파헤친다. 생각지 못한 방법과 생각지 못한 사람이 정답으로 드러났을 때 절로 나오는 감탄사가 추리소설을 읽는 묘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소설은, '악의'는 신기하게도 '왜'에 집중한다. 아니 집착한다. 누가 범인인지는 일찌감치 드러난다. 어떻게 죽였는지도 범인과 동시에 바로 밝혀진다. 소설의 1/4을 겨우 넘은 시점에서 모든 게 밝혀진다니! '그럼 앞으로 남은 부분은 무슨 내용이지?' 하는 걱정이 들 정도다. 하지만 진짜 이야기는 그때부터 시작이다. 범인도 밝히고 방법도 밝힌 형사는 아주 미세하지만 미심적인 부분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왜'를 생각한다. '동기가 부족하다. 물론 이전에 밝힌 것들도 충분히 말이 되고 타당하지만 뭔가 더 타당한 게 있을 것 같다. 뭔가 더 숨겨진 게 있을 것만 같다.' 그가 계속 '왜'를 놓치지 못하는 이유다. 그 덕분에 숨겨진 동기와 숨겨진 또 다른 트릭들이 드러났고, 또다시, 또 한 번, 계속해서 진실을 쫓아가 결국 이면에 있던 모든 것을 끝까지 다 밝혀내고 만다.

'아무리 형사라지만 실제 사람이라도 이렇게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의 '왜'는 끝이 없다. 나였으면 이렇게 계속 생각할 수 있었을까? 연기를 배우면서도 '왜'를 계속 찾아내는 것이 나에게는 퍽 어려운 작업이다. 더 타당한, 더 옳은 '왜'를 찾는 것. 어쩌면 많은 분야에서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추리소설을 읽고 가장 크게 와닿은 부분이 '왜'를 찾는 것이라는 것이 아이러니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다. 그래, 어렵더라도 계속 '왜'를 쫓아가자. 내용 자체의 완성도와 재미, 작가에 대한 경외감뿐 아니라 이런 또 다른 의미로도 울림 준 신기한 소설이다. ('악의'라는 주제에 대한 것만으로도 글을 쓸 수 있겠지만, 그건 아예 다른 주제가 될 테니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쓰는 걸로..)


인간을 묘사한다

소설에 이런 부분이 나온다.

작품을 평하는 말 중에 독특한 표현이 있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말입니다. 한 인물이 어떤 인간인지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글을 써서 독자에게 전달한다는 뜻일 텐데, 그건 단순한 설명문으로는 어렵다고 하더군요.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 '인간을 묘사한다'라는 것이라던데요?


형사가 마지막 트릭을 밝히며 범인에게 건네는 말이다. 이야기의 도입부에서, 범인은 피해자에 대해 아주 사소하고 짧게 적은 글을 형사에게 보여준다. 형사가 먼저 보여달라고 하게끔 아주 자연스럽게. 이로써 형사는 피해자에 대한 어떠한 이미지와 기본적인 생각을 갖게 된다. 초반에 한 번 박힌 그 이미지는 은연중에 피해자의 성격과 태도를 상상하게 한다. 형사는 피해자를 한 번도 보지 않았음에도 이런 사람일 것이라는 편견을 갖게 된 것이다. 그건 독자 역시 마찬가지다. 소설이 끝나기 직전, 진짜가 밝혀지는 순간인 위 문단을 읽기 전까지 나 역시도 피해자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편견을 갖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지막까지 읽고 나서야 나도 소설 속 범인이 묘사한 피해자 이미지에 사로잡혔었다는 걸 깨달았다. 여기서 소름이.... 19페이지에서 속은 걸 392페이지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니...

몰랐던 내용을 알게 된 것과 술수에 걸렸다는 걸 깨달은 건 차원이 달랐다. 소설 속 인물이 만든 판에 놀아난 기분이었다(엄밀히 말하면 이것 역시 작가가 만든 것이지만). 어쨌든 신선한 충격을 준 이 부분에서도 역시 연기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바로 캐릭터를 만든다는 것, 캐릭터로서 수많은 선택을 하며 구축해 온 것들이 결국 인물을 만든다는 것이다.

소설에서도 말한다. 작가가 인물을 묘사한다는 것은 '아주 작은 몸짓이나 몇 마디 말 같은 것을 통해 독자 스스로 그 인물의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도록 쓰는 것'이라고. 연기에서 배우 역시 매 순간마다 자신이 구축한 캐릭터로서 타당한 여러 선택을 통해 관객이 그 인물에 대한 이미지를 갖게 한다. 여기서, 배우가 설정한 인물과 관객이 바라본 인물이 같아야 좋은 연기를 했다고 볼 수 있겠지. 그러기 위해서 배우는 더 명확하게 전달하고 정확하게 표현해야 한다. 수업에서도 배우고 늘 강조한 부분이지만, 다시 한번 더 되새기고 정립하게 된 계기가 됐다.

여러모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 준 소설. 무엇보다... 하루 만에 술술 읽을 만큼 내용과 흐름 자체가 너무 흥미롭고 재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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