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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즈 Jan 25. 2022

사랑의 알고리즘

'우연히' 만나 사랑에 빠진 두 사람

 그와 테레자의 사랑은 분명 아름다웠지만 피곤하기도 했다. 항상 뭔가 숨기고, 감추고, 위장하고, 보완하고, 그녀에게 용기를 주고, 위로하고, 그녀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고, 질투심과 고통과 꿈에서 비롯된 비난을 감수하고, 죄의식을 느끼고, 자신을 정당화하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이제 피곤은 사라지고 아름다움만 남았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상은 그녀와 한 침대에 나란히 누워 책을 펼쳐 들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이상은 으레 습관처럼 잠들기 전에 그녀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다른 생각 속에 잠기기 일쑤였다.

 

바로 이런 생각들이었다.


 '그렇게 서로 다른 '하나'들이 만나 둘이 되었건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새로운 또 다른 하나가 되는 것이 바로 남자와 여자의 만남에 의해 이루어진 사랑이다.


 서로의 하나이기 전에는 자신의 분명한 색깔을 지닌 자아로 존재했지만, 서로를 통해 하나가 되고 난 이후에는 그전에 예상치도 못했던 새로운 색깔을 지닌 존재로 탈바꿈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기묘함이다.

 

 이는 흰색과 검은색의 물감을 섞으면 회색이 될 것이라는 색의 이론을 뒤엎고, 회색이 아닌 파란색이나 노란색이 튀어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과도 같다.


 모든 색깔의 혼합의 결과는 검은색이 되지만 빛의 혼합의 결론은 검은색이 아니라 투명한 색이 된다는 사실을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예상하기 어려운 것이 바로 사랑의 색깔.


 그중에서도 사랑에 빠졌고, 사랑을 하고 있고, 또 사랑을 했던 사랑의 색깔이 섞였을 때 어떠한 색깔이 나올 것인지를 예측하는 일이다.


 인간은 인간 고유의 색과 빛과 감정과 정신과 영혼이 한데 뒤엉켜 60억이 아니라 60조 개의 개인적이고도 독특한, 유일무이 한 단 하나뿐인 성질을 가진 단일체이다.


 인류의 조상 아담으로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태어난 수백억의 인간 중에 유전자가 100% 일치하거나 똑같은 영혼을 수유한 두 사람이 존재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바꾸어 말하면 나는 지금까지 인류가 시작된 이래로, 그리고 인류의 멸망에 이르기까지 유일무이 한 존재이며, 그녀 역시 수백억 분의 일의 확률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존재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여성이다.


 다이아몬드가 금보다 더 비싼 이유는 그 희소성의 가치 때문이다. 하물며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우주에 존재하는 한 사람의 가치는 어떻게 따질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두 사람이 서로 사랑을 통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며 존재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상은 그녀에게 책의 한 구절을 천천히 읽어주면서 다른 한 편으로 이런 생각 속에 잠겨 있다고 해서 어떤 잘못이나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상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등장하는 주인공 테레자와 토마시의 관계 속에 자신과 그녀를 대입시켜 공감되는 부분을 떠올려 자신과 그녀의 관계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확인해 보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상이 책을 읽어주는 대상은 그의 바로 곁에 누워 있는 그녀였지만, 그의 내부에서는 책 속의 테레자를 통해 다시 이상에게로 투영된 그녀의 존재가 다가왔던 것이다.


 소위 소설이란 것은 현실에서 태어나 허구 속에서 자라다가 결국은 다시 현실로 스며드는 것이다.

 

 토마시는 테레자를 첫눈에 반해 사랑했다. 그래서 한 번도 깬 적이 없었던 자신만의 원칙을 깨고 자신만의 잘 짜이고 다듬어지고 계산된 삶에 그녀를 끼워 넣었다. 그는 그녀를 그리워했다가 힘들어했다가 단절되었다가 결국에는 다시 만나게 된다.  


 그렇게 결혼까지 하고 7년이라는 시간을 그녀와 함께 보내게 된다.

 

 그 사이 두 사람 사이를 흘러간 사랑의 감정과 서로에 대한 이해의 무게는 가벼움이었을까 아니면 무거움이었을까? 


이상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6가지 우연이 겹쳐져 절묘한 타이밍에 다다라 둘은 운명처럼 한 숙소 안 식당에서 만나 서로의 삶에 구원이 되어 주었다. 물론 처음에는 그랬다.


  이상은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이런 생각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다.

  그리고 이렇게 혼자서 말했다.


 '그래, 이러한 기막힌 우연이 겹쳐서 우리도 지금 이렇게 서로의 가슴과 성기를 보아도 전혀 낯설지 않은 친숙함을 느낄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어 한 이불속에 같이 누워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와 이상의 만남 사이에는 어디 6가지 우연뿐이었겠는가? 60개, 아니 600개가 넘는 소위 그 '우연'이라는 것이 합쳐져 현재의 현실을 지탱하고 유지시켜 나가고 있는 것이라 이상은 생각했다.


 이상은 문득 그녀가 아는 친구도 고속도로에서 갑자기 차가 고장 나는 바람에 그 차를 수리하러 왔던 렌터카 정비 직원과 '우연히' 만나 결혼하게 된 이야기도 떠 올렸다.

 

 비록 이상과 미정뿐만 아니라 한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드는 수많은 연인과 부부들 역시 그들 스스로 제대로 인식하고 있지 못할 뿐, 결국은 똑같은 사랑의 알고리즘, 즉 '우연'이 겹친 운명 혹은 필연으로 인해 지금도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상은 그녀에게 (미정은 이상의 어깨와 가슴에 자신의 몸을 기댄 채로 곤히 이상이 책을 읽어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책을 읽어주면서 이러한 '사랑의 알고리즘'을 발견했던 것이다.

  

시간은 기다리는 이들에게는 너무 느리고
두려워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빠르며
슬픔에 잠긴 이들에게는 너무나 길고
기뻐하는 이들에게는 너무 짧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에게 시간은 영원하다.

-헨리 반다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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