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부부 연구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즈 Jan 26. 2022

수많은 우연히 점철된 첫 만남

처음에는 서로 다른 매력에 끌려 사랑에 빠진다.

 아침부터 하늘이 심상치 않았다. 6월 초의 제주도 날씨는 변화무쌍했다. 이상이 앉아있는 공항 근처의 게스트 하우스 1층 커피샾 내부에서 매서운 바람에 나뒹구는 화분과 작은 간판이 보일 정도여서 오후 비행기 일정이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는 전날 늦은 밤까지 글을 쓰느라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단은 부족한 잠을 채우고자 다시 작은 2층 침대의 아랫칸으로 기어들어 갔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는 잠시 실눈을 떠서 창 밖을 내다보니 하늘은 여전히 회색 구름빛이었고, 윙윙 소리를 내며 창 밖은 더욱더 거센 바람이 불어댔다.


 그는 정오가 거의 다 되어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왠지 모르게 여전히 피곤했다. 왜일까? 그녀를 다시 만나러 간다는 설렘과 한편으로 예정되어 있던 비행 편이 결항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합쳐진 탓이었을까?


 그렇게 방을 나와 응접실에서 다 식은 빵 쪼가리와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뉴스를 보고 있는데 기상 사태 악화로 예정되어 있던 비행 편이 결항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왔다. 그의 걱정스러운 예상이 적중했던 것이다.


 이상은 곧바로 이 소식을 미정에게 알렸고, 다음날 가장 빠른 비행 편을 알아보았다. 다행히 다음 날 오후 4시 비행 편으로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예상치도 못한 여유로운 시간의 공백이 생겨버린 이상은 이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지 곰곰이 고민을 했다. 어차피 그녀를 다시 만나는 일 외에는 그렇게 급한 일은 없었기에 이상은 지난 일주일 간 일어난 그녀와의 '기막힌 우연'을 가장한 운명적인 만남에 대해 천천히 다시 글로 적어보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제주도에서 더 가 볼만한 곳도, 만날 사람도 없었다. 시간만이 이상의 편이었다. 공항 근처의 꽤나 유명한 게하였기에 이상이 응접실 카페 한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글을 써내려 가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지만 그 누구도 그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역시나 누가 지나다니는 지조차 알 수 없었을 정도로 하루 반나절 동안 계속 노트북을 붙들고 글만 써댔다. 마치 그것에 자신의 구원과 앞으로의 운명이 달린 것처럼.


     


 이상의 비행 편이 태풍으로 인해 연착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정은 잠깐 고민에 휩싸였다.


 만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낯선 남자를, 그것도 자신이 몇 달간 일하던 게하에서 딱 이틀 밤을 지내며 만났던 배낭 여행자를 자신 혼자만 사는 공간으로 흔쾌히 오라고 했던 자신의 말속에 숨겨진 진심이 과연 무엇이었을까에 대한 고민이었다.   


 사랑이었을까? 사랑이라고 하기에는 단지 이틀 동안 그와 함께 우도를 구경하고, 다음날 세화의 조용한 카페에서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 전부였다. 아직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는 단순한 호기심에 가까운 호의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는 지금껏 그녀가 만나왔던 수많은 남자와는 결이 달랐다. 그는 순수한 영혼과 맑은 정신, 그리고 책을 좋아하고, 자신보다 아는 것이 많지만 결코 그것을 자랑삼아 뽐내려 하지 않았던 겸손함과 선한 웃음 같은 모습이 자신의 인생에 터닝 포인트가 될 것 같은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미정은 이상에 대한 알 수 없는 호기심과 선한 호의 같은 것이 생겼던 것이다. 그 호의 속에는 결코 그는 자신을 해하거나 그녀의 삶 속에서 스쳐 지나갔던 수많은 다른 남자들처럼 자신을 아프게 하지 않을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도 섞여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이상의 비행 편 연착 소식을 듣자 머리로는 이건 아니야라는 생각이 솟아 올라왔지만 가슴속에서 꿀렁거리는 어떤 감정이 그 생각을 결국에는 억누르고야 말았다.


 순간 미정은 이상과의 첫 만남이 떠올렸다.


...


 이상은 해가 지는 노을 어스름을 등에 짊어진 채 명랑하고 순수하지만 건강하게 그을린 구릿빛 얼굴로 그녀가 일하고 있던 게하의 문을 스스로 열고 그녀의 세계로 처음 들어갔다.


 "혹시 남는 방이 있나요?"

 무거운 배낭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이상이 말했다.


 "네.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미정은 다음 주면 끝이 나는 게하 스텝의 생활을 이어 제주도의 방을 알아보려고 검색하고 있던 컴퓨터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한 채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미정은 이상의 질문에 당장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않았고, 심지어 검색하던 것까지 다 마무리하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방으로 들어가더니 수건 한 장을 가지고 나와서 이상에게 내밀었다.


 "방은 뒤쪽 편의 다인실이고요. 침대는 비어있는 것 아무거나 쓰시면 돼요. 비용은 선불입니다. 얼마나 계실 건가요?" 미정은 이상의 얼굴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쌀쌀맞게 말했다.


 "일단은 하룻밤인데, 연장하게 되면 내일 다시 말씀드릴게요. 그리고 혹시 근처에 괜찮은 식당이 있을까요?" 하루 종일 걸어서 오느라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던 이상은 항상 게하의 직원들에게서 값싸고 푸짐한 식당에 대한 정보를 얻었기에 그렇게 물었던 것이다.


 "여기 근처에는 없고, 시내 마을 안쪽으로 가보세요. 거기 먹을만한 식당들이 꽤 있어요."

 그렇게 말한 미정은 다시금 자신이 검색하려던 내용이 떠올랐는지 컴퓨터가 있는 책상에 자리를 잡고 앉아버렸다.


 이상은 무거운 배낭만 침대에 덩그러니 던져두고는 챙이 둥근 청색 밀렵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게하의 문을 나섰다. 그런데 웬걸. 바로 옆 건물에 덩그러니 맛있는 냄새가 풍기는 한식당이 있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이상은 더 멀리 갈 필요도 없었다.

 

 이상은 식당으로 들어가면서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뭐지? 나한테 거짓말을 한 건가? 아니면 여기 주변 사정을 제대로 알지 못할 정도로 얼마 전부터 일한 뜨내기인가?'

 

 어찌 되었든 이상은 다른 게하의 직원처럼 그리 친절하지도, 그렇다고 밝지도 않은, 오히려 퉁명스럽고 무관심한 태도와 그리 이쁜 외모는 아니었어도 오뚝한 콧날에 큰 눈을 가진 균형 잡힌 얼굴의 이 여자를 생각하며 혼자서 급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렇게 미정은 전혀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이상은 그녀의 시크하면서도 무관심한 털털함에 커다란 첫인상을 받았던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재빨리 저녁 식사를 마치고 다시 숙소로 들어가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상과 미정의 첫 만남이었다.


 여기에는 테레자와 토마시처럼 수많은 우연이 조합되어 있었다. 


 만약 이상이 이 숙소에 들어가기 전 갈림길에 배낭을 등에 맨 채 바닥에 잠시 누워 주변에 있는 세 개의 숙소 중에서 다른 곳을 선택했다면,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미정이 이틀에 한 번씩 돌아오는 휴일에 예정대로 쉬었다면(그 전 주에 다른 스텝의 어머니가 아파 급하게 육지로 가게 되어 미정은 4일 연속 일을 하던 마지막 날이었다), 이상은 다른 스텝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만남을 가졌을 것이다.

 

 만약 이상이 제주도 배낭여행을 동쪽이 아닌 서쪽으로 돌기 시작했더라면 역시 이 만남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미정이 오래도록 다니던 회사를 관두고 급작스럽게 제주도로 쉴 겸 쉬운 일을 하기 위해 숙식이 제공되는 이곳 게하에 오지 않았다면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이상이 부산에서 여행을 끝마치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이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미정이 이상을 처음 만나기 바로 몇 분 전부터 컴퓨터 모니터 앞에 앉아 자신이 살 집을 검색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상은 그녀의 무뚝뚝하면서도 퉁명스러운 면모에서 그 어떤 매력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 외에도 30년을 넘게 각자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살아오면서 내렸던 셀 수도 없는 수많은 선택의 결과로 사람들이 잘 찾지도 않는 작은 게하에서 정말 '우연찮게' 그들의 만남은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단 이틀 만에 완전히 다른 서로의 매력 속으로 서서히 빠져 들어가 서로를 자석처럼 잡아당기게 되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의 알고리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