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 부동산과 한인타운 집투어
중국 집투어를 하며 알게 되었다. '아, 내가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구나.'라고 말이다. 남들이 좋다는 걸 추천해 주고, 주류 위주로 소개해주는데, 내게는 그 '좋음'이 '어색함'으로 다가왔다. 남들처럼 대접받으며, 편하게 살 팔자는 아닌가 보다고 느꼈던 순간이다.
1박 2일의 중국 방문으로 처음 가본 중국의 첫인상은 공항에서의 당황스러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회주의인 중국은 기본적으로 유튜브, 구글, 카카오톡, 네이버, 다음과 같은 사이트를 이용할 수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 명씩 차단되었다. 또 중국어를 모르면 언어 소통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른다. 한국에서 무료 VPN과 파파고나 구글 번역기와 같은 프로그램을 미리 다운로드하지 않은 우리는 순식간에 핸드폰은 깡통에, 벙어리가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고, 못 알아들으니 그냥 하는 말도 우리한테 혼내는 느낌으로 들리고 정신이 혼미했다. 또, 공항에서 본 직원들의 복장과 분위기가 경직되어 있는 느낌을 받았다.
여행이 아닌 살기 위한 곳의 투어였기에, 앞으로의 중국에서의 향후 우리의 미래가 까마득해지는 순간이었다. 쩔쩔매며 통과한 입국 심사 끝에 우리를 기다리던 사람은 다름 아닌 '조선족'이었다. 중국에서 처음으로 만났던 사람이다. 회사에서 연결해 준 부동산 직원이었고, 처음 만나는 조선족 특유의 억양을 쓰는 담당자는 신기하기도 했다. 우리는 바로 '집투어'를 위해 부동산 직원이 제공해 준 차량을 이용하여, 베이징의 공항을 빠져나와 시내로 이동했다. 담당자가 배정이 되어서 책임을 져주는 시스템이 신기했다.
그런데 좀 불편했던 점은 호칭이었다. 그는 나를 계속 ’사모님‘이라고 불렀다. 남편은 ‘사장님’이라고 불렀다. 갑자기 직원은 사장님으로 진급을 했고, 나는 전업주부, 아줌마에서 ‘사모님’이 되었다. 내가 딱히 “다른 호칭으로 불러주세요. 불편해요.”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으레 그렇게 부르는 게 통념이 되어버린 듯했다. 결과적으로 조선족 부동산과는 오랜 거래를 하지 않아, 그 뒤로는 그 호칭을 들을 일이 없었지만, ’사모님‘이란 호칭은 지금까지도 닭살이 돋고, 오글거리고, 뭔가 불편했다.
서울과 달리 넓고 쭉 뻗은 도로, 광활한 대륙의 중국이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는 동시에, 거리의 빨간 현수막들이 TV에서 보던 '북한'을 연상시켰던, 살짝 얼었던 그때의 기분이 생각난다. 한국에서 집을 보던 문화와 달리, 종이파일에 볼 수 있는 집의 단지 이름, 사이즈, 가격, 난방이 온돌인지 라디에이터인지, 영수증 처리의 가능 여부 등이 표로 작성되어 있었다. 중국의 집계약은 기본이 1년 계약이라서 신중히 결정해야 했다.
당시에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갔던 때고, 주재원의 대부분은 한인타운의 몇 개 아파트에 모여 산다고 남편을 통해 들었고, 부동산 직원 역시 준비해 놓은 집들은 전부 한인타운 근처의 한국 사람들이 많은 아파트였다. 땅덩이가 넓은 중국 아파트는 동 간 거리가 상당히 넓었고, 아파트 한 동의 사이즈가 대륙 이미지처럼 컸다. 약간 투박하기도 하면서, 집 내부의 인테리어는 제각각이었다.
녹물이 많이 나오고 오래됐지만, 학원이 근접하고 생활편의시설이 좋아서 인기가 많다던 곳, 녹지가 풍부하고 프리미엄 마트가 근처에 있다던 곳, 쇼핑몰 근처에 있는 집 등 여러 집을 보았다. 헬스장과 실내수영장도 참 이색적이었다. 주말이라 연락이 닿지 않아서 못 본 집도 있었고, 중국 집의 기본 가구, 가전 등으로 한국의 짐을 많이 줄여야 한다는 부담감보다 내게 더 크게 느껴졌던 건, 거리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한국말이었다. 한인타운이니만큼 거리에서 삼삼오오 모여 다니는 한국인들이 꽤 있었고, 집을 볼 때도 엘리베이터에서도 만나기도 했다.
한인마트나 한식당이 근처에 있거나, 학원가가 가깝거나, 병원이 가깝거나, 대형 쇼핑몰이 가까운 곳은 당연히 한국인이 살기에 최적의 환경이다. 대부분의 주재원들이 좋아하는 취향이고, 주로 그곳에 모여사는 분위기라고 그 직원분도 그렇게 준비를 하셨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생각이 좀 달랐다.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서 살게 되면, 서로 도움도 주고받고, 향수병을 느낄 새도 없이, 오손도손 타지에서 정을 나누며 살 수도 있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친구가 아닌 아이 친구 엄마로서 만난 관계에 대한 회의감도 느꼈던 터라서 적당한 거리를 지키고 싶었다. 옆나라 중국이라고 해도 해외살이는 해외살이니, 이 문화에 푹 빠져서 진정한 해외생활을 해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집에서 학교의 거리가 꽤 멀어서 스쿨버스를 오래 타야 한다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저녁에 우리 가족끼리 호텔에서 쉬다가 근처의 한식당을 방문해서 김치찌개를 먹었을 때는, 약간 간이 강하긴 했지만 해외에서 먹는 첫끼가 한국 음식인 게 신기하기도 했다. 당시 위챗페이가 깔려 있지 않아서 위안화로 현금을 가지고 갔는데, 중국어도 안 돼, 돈 단위도 몰라서 직원이 우리 손에서 지폐와 동전을 알아서 가지고 가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나오면서, 한인타운의 상징인 왕징 Soho 건물도 보고 한인타운의 저녁 분위기를 충분히 느꼈다.
다음 날 국제학교 인터뷰를 보게 되었는데, 처음 본 중국 국제학교의 시설은 어마어마했다. 일반 공립초등학교를 다니다 왔으니, 압도적인 시설과 분위기에 매료되었고, 국제학교의 교문을 경계로 해서 중국과 중국이 아닌 곳으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학교를 이동 중에 지금까지의 중국의 풍경과 확연히 다른 '동화마을'같은 곳을 지나는데, '아! 저기다! 저기에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직원에게 연락했지만, 직원을 통해 들은 가격은 우리 주재원 수당으로는 불가능했고, 한국 사람이 살기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추천하지 않고 계속 한인타운의 장점만 열거하며, 그쪽 집만 추천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힘들게 온 1박 2일 일정이니만큼 그래도 집구경을 하고 싶어서, 나의 요청으로 집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와, 여긴 유럽인가? 한산해서 인적도 드물고, 층이 낮아서 하늘이 보이고, 자연 속의 동화마을 같았다.
그 근처단지라도 좋으니, 가장 저렴한 집을 추천해 달라고 했지만, 일반 조선족 부동산은 한인타운 근처의 한국인들이 선호하는 아파트들 위주의 물건만 가지고 있어서 정보는 찾지 못하고, 여기는 한국인한테는 맞지 않다, 불편하다, 외롭다 등의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눈만 높아진 상태로 집은 구하지 못한 채, 우리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갔다. 결국 1박 2일에서 우리가 얻은 건, 한인타운 구경, VPN의 소중함, 중국어 걱정, 국제학교 입학뿐이었다. 보통은 부동산에서 소개해주면, 그중에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가면 되는데, 2 달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첫 해외살이에서 실패하지 않고 싶은 마음이었는지 쉽게 한인타운의 집을 결정할 수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좁은 한국 사회에서 내가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는 점과, 회사 사람들 근처에 집을 얻어 산다는 불편한 점, 또 수시로 부를 수도 있다는 점, 살다 보면 서로 얼굴을 붉힐 수 있다는 점 등이 내향적인 우리 부부와 개인적인 생활을 중시하는 우리 가족에게는 큰 걸림돌이었다. 또, 남편의 회사도 아이의 학교도 한인타운 근처가 아닌데, 왜 한인타운에 살아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말 안 듣는 주재원 와이프였다.
사진 : Pintere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