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에 남는 전쟁영화와 무의식에 미친 문화의 힘
20여 년 전, 중동에서 근무할 당시 문화적으로 매우 척박한 환경에서 지내며 ‘당나귀’라는 P2P 파일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간혹 영화를 다운로드해 보곤 했다. 지인이 보내준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 전편이 담긴 비디오테이프 한 개조차 가뭄의 단비처럼 귀했다. 그 시절 가장 인상 깊게 본 작품 중 하나가 2001년 미국 HBO에서 방영된 10부작 전쟁 드라마 《Band of Brothers》였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세트장을 철거하기 아까워 스필버그와 톰 행크스가 후속작 개념으로 제작했다는 뒷이야기도 전해진다.
이 드라마는 전장의 리얼리티, 디테일한 묘사, 그리고 병사들의 심리와 행동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점에서 깊은 인상을 주었다. 처음에는 주말 내내 몰아봤고, 그 후 몇 년에 걸쳐 에피소드별로 다시 감상했다. 그 영향인지 행정병으로 군 생활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지금도 관련 정보들을 인터넷에서 종종 찾아보곤 한다. 스스로를 ‘준(準) 밀덕’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다.
또 한 편 기억에 남는 영화는 독일 유보트를 소재로 한 《Das Boot》다. 1980년대 초, 고등학생 시절 서울의 국제극장에서 처음 관람했는데, 현장감과 몰입도는 물론이고 메시지의 무게감까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이후 DVD로도 여러 번 다시 감상했고, 그 여파로 독일 유보트를 포함한 당대의 독일 전쟁 무기와 기술력에 감탄하게 되었다.
이 두 편의 웰메이드 영화는 지금도 내 SNS 피드에 추천 영상으로 종종 떠오르고 있다. 그 덕분에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생겨 찾아보니, 구독 중인 쿠팡플레이에 《Band of Brothers》가 있어 주말에 다시 볼까 고민 중이다. 기회가 된다면 《라이언 일병 구하기》나 《Das Boot》도 재관람하고 싶다. 요즘은 OTT에서 쉽게 구할 수 없더라도 유튜브 무비를 통해 저렴한 가격으로 바로 감상이 가능하니, 편리한 시대에 살고 있음이 실감 난다.
한편, 영화라는 매체가 성인의 정신세계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에서 문화 산업의 힘과 미디어의 영향력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할리우드 영화와 홍콩 영화를 보며 자란 내 세대는 과연 어떤 무의식의 영향을 받아왔을까,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덧붙이자면, 1990년대 말 자주 갔던 싱가포르에서는 당시 한국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었다. 하지만 2000년대 초 《대장금》이 동남아를 휩쓸고 나서 한식당이 눈에 띄게 늘었고, 지금은 한식당 거리가 형성될 정도로 한국 문화가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류는 K-pop, 드라마, 화장품, 놀이문화, 이발소까지 일상에 파고들었다.
단순히 옛 영화에 대한 향수로 시작된 글이 결국 문화산업과 미디어의 무의식적 지배력에 대한 사색으로 확장되었지만, 이번 기회에 나 또한 내가 의식하지 못한 채 영향을 받아온 콘텐츠들을 돌아보며, ‘나는 왜 지금 이 생각을 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