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때 잘하자, 아직 안 늦었다
며칠 전, 환절기에 길게 산책을 해서 그런지 오한이 와서 이틀째 회사를 못 가고 있다. 마침 바쁜 일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이 기회에 좀 쉬어 가자고 스스로 다독였다. 삼십 년 넘게 직장 생활을 하다 보니 낮 시간대에 집에 있는 것이 무척이나 낯설다. 뉴스를 보고 즐겨 듣는 유튜브 프로그램을 들어도 시간이 안 간다. 그나마 얼마 전부터 루틴으로 접어든 독서를 해보지만 한 시간을 넘기기 힘들다. 나도 모르게 회사 이메일을 들여다보고 직원들에게 메신저로 말을 걸고 있는 나를 발견하며 은퇴 후의 모습을 보게된다.
진짜 문제는 아프다고 집에 누워 있는 나에 대한 아내의 반응이다. 그 동안 내가 퇴근하기 전까지 누려 온 평화의 시간에 폭탄을 맞은 것이다. 매일 정성스럽게 차렸던 저녁 밥상은 내가 하루 종일 집에 없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정년퇴직하고 집에 들어앉아 있으면 주부들이 몇 개월 내 우울증에 걸린다는 말이 실감 났다. 노후에 서로에게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단독주택을 지어서 살고 있는데도 이러니 부부가 아파트에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 정말 문제가 많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좀 전 아내의 분위기를 보니 사흘을 못 넘길 것 같아서 내일은 억지로라도 출근해야 할 것 같다.
한편으로는 좀 억울한 생각이 든다. 평생 일하느라 하고 싶은 일도 못 하고 건강도 제대로 못 챙기며 살다가 그동안 혹사시켰던 몸이 아프기 시작한 것일 텐데 눈치를 보게 만들다니… 요즘은 이런 얘기를 하면 ‘아직 정신 못 차렸구나’라는 얘기를 듣기 십상이지만, 솔직한 심정이다. 아내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혼자 애 키우고 대학 보내고, 자신의 꿈은 펼쳐 보지도 못하고 가사에 ‘올인’했으니 보상 심리가 꽤 클 것이다. 겨우 낮 시간에 방해받지 않을 권리를 주장하는 건데 그게 뭐가 문제냐고 하면서 나의 억울함을 일축시킬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남자들의 인간관계는 좁아진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최소한의 관계만 유지하고 있는 지금, 아내와의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느낀 지는 좀 되어 나름 노력해 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슬 좋은 부부라도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수는 없다. 또한 서로의 취향과 사적인 영역을 존중해 주어야 부부 관계도 유지될 것이다. 그동안 나름 노후의 독립적인 삶을 위한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부해 왔는데 아직 멀은 것 같다. ‘마인드셋’도 틀렸고, 고독을 즐길 수 있는 준비도 안 되어 있다. 이제 얼마 안 남은 기간 동안 더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