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에서 피어난 꽃 (제22 화)

(소설) 새 보금자리 & 전화위복

by 황윤주

제22 화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이 유난히 맑고 푸르다.

시원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어온다.


희숙은 그동안 정들었던 가족의 울타리를 떠나 남편, 아들과 함께 새 보금자리로 이사를 했다.

비록 방 하나에 부엌 하나 단칸방이었지만 남편과 아들이 함께여서 행복했다.

얼마 만에 독립한 것인가?

희숙은 한껏 부푼 가슴으로 살림살이를 정리했다.

집 앞에 물이 흐르는 작은 냇가가 있어 경치가 좋았다.

희숙은 그들만의 공간에서 소박하지만 미래에 대한 설계도 하고 꿈도 가졌다.

살림살이도 올망졸망 사다 놓았다.

밥과 찌개를 하여 동그란 상 위에 올려놓고 남편과 모처럼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였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별다른 반찬이 없어도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꿀맛 같은 맛있는 밥을 먹었다.


한편 희경이 가족들도 정들었던 삶의 터전 판잣집을 떠나 아랫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식구가 늘기도 하였고 생활 형편도 나아져서 조금 더 나은 환경으로 옮겨왔다.

그렇다고 하여 호화로운 집은 아니었다.

소담한 집이었다.

지은 지 오래된 시멘트 기와집으로 방 두 칸에 작은 마루, 마당이 있는 그런 집이었다.

무엇보다 수돗물이 나오는 집이었다.

이제 희경이 힘들게 물지게를 짊어지고 비탈길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마당 한쪽에 세를 놓을 수 있는 부엌이 딸린 방이 하나 더 있었다.

희경을 비롯해 온 가족이 설레었다.


판잣집에 살 때,

무더운 여름 햇빛이 강렬하게 내리쬐면 지붕이 열을 받았고 그 열이 집 안으로 내려와 온 집안이

찜통이 되었다.

그러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

추운 겨울이면 바람이 판자 틈으로 스며들어와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방만 겨우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밤이면 솜이불을 겹겹이 덮고 두꺼운 옷을 입은 채 코만 빼꼼히 내놓고 잠을 자야 했었다.


반면에 새 보금자리는 아늑하였다.

비록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좀 시끄럽기는 하였지만 정감이 느껴지는 집이었다.

집다운 집이었다.

이런 집에서 사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두가 꿈만 같았다.

희경은 한껏 들떠서 잠을 자야 할 시간임에도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그것은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철부지 어린 자식들은 영문도 모른 체 해맑게 웃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녔다.

온 가족이 이 집 저 집 전전긍긍하면서 살아온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희경의 부모님은 오랜 세월 가난에 허덕이면서 살아온 터라 눈물이 앞을 가렸다.

"쫄딱 망해서 옷보따리만 들고 서울로 올라온 것이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벌써 이렇게 흘렀나?"

"우리에게 이런 날이 오다니... "

가슴이 먹먹해졌다.

부부는 그렇게 넋두리하면서 새벽까지 뜬눈으로 지새웠다.

날은 어느새 환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오빠 영호도 꿈만 같았다.

밤새 이리저리 뒤척이느라 밤잠을 설쳤더니 정신이 몽롱하였다.

판잣집에서 사는 것이 조금은 부끄럽고 위축이 되기도 했었다.

이제 기를 펼 수 있게 되어 한없이 기쁘고 감사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기를 썼던 지난날을 생각하면 가슴이 울컥했다.


영호는 학교 생활이 날로 재미있었다.

선생님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사장님의 손녀도 소개받고 교제를 하였다.

그렇지만 마음 한 구석이 늘 무거웠다.

생활 수준이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그래서 교제를 하는 내내 주눅이 들어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몸에 안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불편함이 항상 있었다.

늘 멀게 느껴지는 만남이었다.


희경의 연합고사 시험 날이다.

날씨가 유난히 추었다.

희경은 밥을 단단히 챙겨 먹고 길을 나섰다.

거리는 차들로 북적거렸다.

버스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위치에 시험장이 있었다.

생활 형편이 어려워 여상을 가서 일찍 취업해 돈을 벌려고 그 여상에 원서를 낸 것이었다.

그래서 그 학교로 시험을 보러 온 것이었다.

희경이 합격이 되면 다닐 수도 있는 학교였다.

학교 운동장은 고요하였다.

시험을 보러 들어가는 학생들의 발자국 소리만이 날 뿐이었다.

희경은 잔뜩 움츠린 채로 시험장 교실로 들어갔다.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가슴이 콩닥거렸다.

연거푸 심호흡을 하였다.

시험 감독 선생님 말씀이 있고 난 후 잠시 뒤 시험 시작종이 울렸다.


희경은 시험 보는 내내 긴장을 누추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시험 시간이 되었다.

한참 문제를 푸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릿해졌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글씨가 또렷이 보이질 않고 겹쳐 보였다.

순간 당황했다.

문제를 도저히 풀 수가 없었다.

정신없이 답안지를 써 내려갔다.

답안지를 제출하고 앉아있는 동안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희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리고 마음을 가라앉혔다.

어떻게 답안지를 작성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순간

'아~~ 망했다.' 생각이 들었다.


차를 타고 집에 오는 동안 머리는 텅 빈 채로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몹시 우울하였다.

슬픈 마음도 들었다.

누구한테 말도 못 하고 속을 태우며 끙끙 앓았다.

'왜 하필 나에게 그런 일이 생겼을까?'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떨어질 건 뻔하였다.

아예 기대를 접었다.


합격 발표 하는 날이다.

영호가 따라나섰다.

희경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오빠가 하는 대로 그냥 두었다.

게시판에 합격자 명단이 붙여졌다.

영호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서 위부터 아래까지 몇 번씩 훑어보았다.

희경의 이름이 보이지 않았다.

싸한 기분이 들었다.

낙방이었다.

희경은 담담했다.

당황스럽고 어리둥절한 건 오히려 오빠 영호였다.

애써 담담하게 희경에게 말을 건넸다.

"너무 실망하지 마. 인문계가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 한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었다.

여상보다는 인문계가 커트라인이 조금 낮기 때문에 혹시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마지막 시험 답안을 어떻게 표시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서 확신할 수 없었다.


여상에서 떨어지고 한참 기다려야 했다.

다행이었다.

시험 점수가 발표되고 인문계 합격을 하였다.

어느 학교에 배정 될지는 더 기다려야 했다.

추첨을 통해 배정을 하기 때문이었다.

희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제야 마음 놓고 웃어 보였다.

어느 학교로 배정될지 사뭇 궁금하였다.


학교 배정 추첨일이었다.

희경아버지와 희경은 라디오 앞에 바짝 붙어 앉았다.

째깍째깍 초침 넘어가는 소리마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신경이 예민해 있었다.

촉각을 곤두세웠다.

두 귀를 쫑긋 세웠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희경의 학교 배정이 되는 찰나였다.

학교 이름이 불리는 순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희경아버지도, 희경도 깜짝 놀랐다.

'잘 못 들었나?'

고개를 갸우뚱했다.

하지만 진짜였다.

사실이 확실했다.

서울 시내 오랜 전통을 가진 명문 여고였다.

희경아버지는 손뼉을 치면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희경도 꿈을 꾼듯했다.

하늘이 주신 선물 같았다.

순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빠르게 쿵덕거렸다.

너무나도 큰 감동이 밀려왔다.

꿈같은 일이 현실이 될 줄이야.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하는 걸까?'

희경은 마치 구름 위에 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마구마구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시작하였다.


희경은 예비 소집일 날 학교를 갔다.

교문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넓고 큰 교정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얼굴이 발갛게 상기되었다.

외국인 선교사 이름을 붙인 건물도 있었다.

유명 연예인들이 가끔 공연하는 기념관도 있었다.

학교 곳곳 잘 가꿔진 잔디밭에 꽃나무들이 있었고, 등나무길 옆에 노천극장도 있었다.

나무들이 잘 가꿔진 것이 마치 숲 속에 온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희경은 눈과 마음속에 그 풍경을 가득 담았다.


희경은 학교 근처에서 교복과 갈색 구두를 맞췄다.

가방도 샀다.

하늘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달리는 전철 안에서 기대반 설렘반 부푼 꿈을 안고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전철이 지나가는 철길 밑으로 한강 물이 햇빛을 받아 유난히 반짝거렸다.

금빛 물결이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희경은 교복을 입어보았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보고 활짝 웃어 보였다.


조그만 한 아이가 바닷가 어느 마을에서 살다 서울로 상경을 해서 서울 시내 명문 여고를 다니게

되다니...

상상할 수도 없는 현실에 감회가 남달랐다.

태어나서 한 번도 믿어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을 3년 동안 접하게 되었다.

매주 한 번 성경 공부를 하고, 매주 한 번 예배를 보면서 찬송가를 부르게 되었다.

희경은 호기심이 가득 생겼다.

학교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정도의 100년 전통이 얼마 남지 않은 뿌리 깊은 학교였다.

초록빛 잔디가 있는, 둥그런 반원 모양의 돌계단 스탠드에 방석을 깔고 앉아서 성경책과

찬송가 책을 들고, 전자올겐 연주 소리에 맞춰 찬송가를 부르고, 목사님 설교를 듣고,

찬송가가 하늘 높이 멀리멀리 울려 퍼졌다.

희경의 가슴에 묘한 전율이 퍼졌다.

찬송가를 들으면서 따스한 온기가 구석구석 은총과 사랑이 되어 스며들었다.

"내게 강 같은 평화"

"내게 강 같은 평화"

귓전에 전해지는 전자올겐 소리와 여학생들이 부르는 소리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메아리가

되어 들려왔다.


목사님의 기도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가르는 하나님 말씀으로 뇌리와 가슴에 가득 채워졌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온 누리에 퍼지 듯 희경의 몸과 마음에 조용히 젖어들었다.

그 순간,

그 시간만큼은 평온이 깃들어있었다.

희경의 가슴에 믿음의 고운 싹이 조금씩 움트고 있었다.

해맑은 웃음이 모든 근심과 걱정을 싹 지워버렸다.

모든 것이 새롭게 리셋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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