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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an 27. 2022

내가 '와카남'이 될 상 인가?


저번 주 토요일, 오전 10시가 다 되어가는데 안방 침대에선 아직도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이 시간에 코를 곤다고?’ 나는 안방 문에 비스듬히 기대어 자는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화를 넘어서 신기했다. 보통 이 시간이면 끙-하는 소리나 뒤척이는 소리가 날 법도 한데 아주 깊은 밤인 것처럼 자는 남편이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침대로 걸어가 남편을 발로 툭툭 찼다. 

“학. 일어나. 밥 안 먹어?”

남편은 그제야 눈을 겨우 뜨고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나 10분만.”

평소 같으면 10분 같은 소리 하네. 하며 팔을 잡고 어떻게든 일으켜 세웠겠지만, 그날은 짧게 한숨을 쉬고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남편은 그 주 5일 내내 새벽에 퇴근했다. 광고 회사에 다니는 남편은 직업 특성상 경쟁PT가 있을 때면 늘 야근을 했다. 아이디어가 나올 때까지 고민하고 회의하고 검증해야 했기에 일의 끝을 알 수 없었다. 모래사장에서 있을지 없을지 모를 다이아몬드를 찾는 일 같았다. 광고 회사에 주 52시간 제도 같은 건 있으나 마나였다.     


 나는 첫 회사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부사수로 밑에서 일을 배웠는데, 어쩌다 보니 일과 사랑을 동시에 배우게 되었다. 같은 회사, 같은 직군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인지 남편의 고됨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오전 9시나 오후 9시나 다를 바 없던 사무실 풍경. 저녁을 먹고 다시 시작되는 회의.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아 빙빙 도는 말들. 연신 하품과 한숨이 나오기 시작하는 새벽. 기획자와 디자이너 사이의 긴장감. 내 아이디어를 설득하기 위해 목소리가 높아지고 얼굴이 벌게지던 시간과 PT 탈락 소식에 맥 빠지던 순간들. 그저 밥 벌어 먹으려고 하는 일 치곤 에너지 소모가 너무 컸다. “이렇게까지 살아야 해? 열정은 개뿔..씨..”날마다 옥상에서 동기와 회사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살아야 해?’라는 말이 튀어나오던 진절머리 나는 일을 남편은 17년째 하고 있다.     

 

 “커피를 안 마셔서 머리가 아픈가 봐.”

느지막이 일어난 남편이 냉장고에 커피를 꺼내 마시며 말했다. 인상을 잔뜩 쓴 얼굴에 주름이 가득했다. 예전엔 커피 마시는 일이 별로 없던 남편이라 하루에 몇 잔 정도 마시느냐고 물었다. 

“하루에 5잔. 한 잔에 카누 2봉지 넣어서.”

남편의 말에 헉! 소리가 나왔다. 

“하루에 카누 10봉지 마신다고? 너무 많이 마시는 거 아니야? 그거 카페인 중독이야!”

놀란 내가 다그치듯 말했지만, 남편은 남은 커피를 꿀떡꿀떡 넘겼다.

“나도 예전 같지 않아, 수현아. 이렇게 해야 새벽에 회의하지.”

예전 같지 않다는 말에 우리가 같이 일했던 그 시절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보다 10배는 더 마르고 명품 티셔츠를 입고 있던 남편. 카피 하나로 기획팀장과 의견이 엇갈려 언성을 높이던 남편. 내가 쓴 카피에 대해 피드백을 하던 중‘너 광고 왜 하냐’며 인상을 쓰던 남편. 일하는 중간 얼핏 쳐다보면 모니터에 얼굴을 가까이하고 뭐라고 중얼거리며 카피를 쓰던 남편이 떠올랐다. 그 얼굴에 나도 일을 잘 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기기도 했다.     


 남편은 아직도 그렇게 일하고 있을까. 내게 일 욕심을 만들었던 그 얼굴로 아직도 일하고 있을까. 하루에 카누 10봉지를 마셔가며 일하는 남편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언젠가 남편에게‘와카남’만들어 주겠다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던 내가 생각났다. 남편이 커피를 줄이려면 하루빨리 와카남이 되어야 할 텐데. 조금만 기다려 여보. 한 10년만 넉넉히. 나는 마음속으로 의미 없는 약속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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