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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n 23. 2023

나를 살게 한 창밖의 풍경


“저흰 여기서 9년 살았어요.”


나는 집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앵무새처럼 이 말을 반복했다. 사실 9년 동안 이 집에서 산 건, 이곳이 완벽하게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이사를 고려할 때마다 타이밍이 맞지 않아 포기한 상태가 9년까지 이어져 온 것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집을 보러 오는 사람들에게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며 집에 대한 좋은 점을 줄줄 읊어댔다. 집이 빨리 나가야 나도 보증금을 맘 편히 받을 수 있으니까. 집을 둘러보는 이의 눈이 아이의 낙서로 가득한 벽지에 멈추자, 중개인이 얼른 말을 보탰다.


“전체적으로 리모델링은 싹 다 해야 해요.”


우리의 추억이 타인의 눈에 흉터처럼 보이는 순간, 나는 조금 민망해져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집을 보던 이가 층간 소음은 어떤지 묻자, 나는 이 집에 살면서 별로 대화해 본 적 없는 윗집과 아랫집 사람들을 떠올리며 최대한 좋게 이야기를 했다. 


“여기 윗집이 중년 부부가 사셔서 (5시부터 8시까지 그 댁 손주만 없으면) 층간 소음도 없고요. (등굣길이 험하긴 하지만) 초등학교도 코앞이라 걸어서 10분도 안 걸려요. 집주인도 (연락이 잘 안 되긴 해도) 좋은 분이세요.”


나는 애써 말들을 줄여가며 집의 장점을 이야기하다 상대방의 반응이 영 시원찮다 싶으면 거실 베란다로 그들을 이끌었다. 


“여기가 5월쯤에 아카시아 꽃 피면 향기가 진짜 좋아요.”


필살기나 다름없던 거실 베란다 뷰를 보여줘도 사람들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저 ‘아, 네, 좋네요.’ 라던가 ‘오~오~’ 하는 짧은 감탄사만 내비칠 뿐, 중개인과 ‘집주인이 이 집을 어디까지 고쳐주기로 했는지, 화장실 리모델링을 하고 들어온다면 네고가 가능한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나는 그들의 짧은 대화를 들으며 혼자 창밖의 산을 바라보았다. 


내 나이 서른부터 서른아홉까지, 30대 전부를 이 집에서 보냈다. 집 뒤편으로 낮은 산이 하나 있었는데, 9층이었던 우리 집에서 빼곡한 나무를 바라보는 일을 나는 무척이나 좋아했다. 아홉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며 나는 밤사이 얼마나 많은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아침엔 커튼을 젖히면 “와! 어느새!” 하는 감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초록 잎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나무는 푸르른 잎을 들어내며 웅장하게 서 있었고, 어떤 날은 풍성한 나뭇잎을 순식간에 떨구고 겨울잠에 빠져드는 나무를 볼 수 있었다. 그 모든 변화는 밤사이에 일어났고, 나무들은 역시 아이처럼 밤에 더 많이 자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이 집에 온 지 5년쯤 되던 해에 재취업을 했다. 당시 큰 아이는 5살, 둘째는 2살로 재취업을 하기엔 조금 이른 상황이긴 했지만, 나는 이렇다 할 계획도 없이 ‘일단 합격하면 그때 생각하자’라는 마음으로 면접을 보았고 덜컥(?) 합격했다. 출근일까지 딱 1주일의 여유가 있었는데, 아이들이 하원 후 돌봐줄 이모님을 구하고 남편과 스케줄을 조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막상 회사로 출근하고 나니 그때 정신없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적응이란 말 자체가 사치인 것처럼 느껴질 만큼 나는 몇 년간 이 일을 해왔던 사람처럼 첫 출근부터 바로 업무에 투입되었고, 남편은 내가 전업맘이든 워킹맘이든 늘 야근이었다. 왕복 3시간이 걸리는 회사를 오가며 일과 육아, 살림을 혼자 맡아하던 나는 아이들 저녁밥을 먹이다 아이 수저를 든 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쓰러질 듯 말 듯 위태로운 내 어깨를 흔들며 큰 아이는 소리 질렀다.

“엄마! 죽지 마!”


그렇게 피곤한 하루를 보내면서도 금요일 밤이 되면 잠드는 게 아쉬워 늘 새벽마다 깨어있었다. 육아서적 대신 사놓은 지 며칠이 지난 소설과 에세이를 읽고, 장난감이 나뒹구는 바닥에 모로 누워 실없는 농담이 오가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유튜브를 한참 보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다른 얼굴이 되어버리는 영화 속 주인공이 지금의 얼굴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잠을 참아내던 장면처럼 나는 스르륵 감기는 눈을 몇 번이고 고쳐 떴다. 잠도 일처럼 느껴지던 그 시절엔 어떻게든 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잠을 참다가 새벽 5시가 되고 나서야 겨우 잠자리에 들곤 했는데, 침실로 들어가기 전 베란다에 놓인 의자에 가 앉았다. 잠에 반쯤 취한 내가 마지막으로 보는 것은 서서히 동이 트는 창밖의 풍경이었다. 창밖은 어두운 장막을 걷으며 아침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베란다 의자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고 어둠이 사라지는 세상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뒷산의 나무들이 제 색을 찾아내고 세상에 가장 작은 존재들은 소리를 내며 한낮처럼 분주히 하늘을 날았다. 창을 열고 숨을 깊게 내 쉬면 열기가 없는 맑은 공기가 온몸으로 퍼졌다. 어떤 풍경은 숨만으로도 볼 수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새벽의 공기만이 내가 살아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한때는 그 베란다에 걸린 빨래 걸이에 목을 매거나 창밖으로 몸을 던지는 상상을 했던 적이 있었다. 첫애가 태어나고 일 년이 채 안 되었을 무렵, 밤마다 칭얼거리는 아이를 등에 업고 나는 나의 죽음을 생각했다. 퇴근 후 죽은 나를 보고 사색이 된 남편의 표정과 거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울고 있는 아이를 상상하면 나는 조금 눈물이 났다. 울고 있으면서도 속으론, ‘일어나지도 않은 일로 운다는 건 참 이상하군.’ 하며 울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마 산후우울증 초기 같은 게 아니었을까, 싶다.


하지만 용케도 나는 베란다에서 몸을 던지지도 않고 목을 매달지도 않았다. 그저 밤새 아이를 등에 업고 휘휘 부는 바람에 따라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흐르는 나무를 바라볼 뿐이었다. 나무들은 말 그대로 흐르고 있었다. 빽빽한 나뭇잎들이 마치 벼랑을 만난 물처럼, 한 곳으로 쏟아지는 모습을 나는 제자리걸음을 하며 바라보았다. 바람이 거세게 불어 나뭇가지가 갈피를 못 잡고 끊어질 듯 휘청이는 모습을 보는 날이면, 나는 어딘가를 향해 소리를 지른 것처럼 마음이 시원해지곤 했다. 창밖에 산이 내게 보내는 위로이자 응원 같은 물결이었다.



“잘 봤습니다.”


사람들은 작은 방을 마지막으로 보고 현관문을 나섰다. 닫힌 현관문 사이로 신발장이 작네, 어쩌네 하는 말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글렀군. 나는 기지개를 켜며 푸른 나무로 빼곡한 베란다로 걸어갔다. 초여름 풍경에 걸맞게 초록 잎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나무들 위로 뭉게구름이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할 수만 있다면 이 풍경을 담은 창문을 똑 떼어 가져가고 싶었다. 누가 이 자리에 서게 될까. 나는 아직 오지 않은 그 사람을 부러워하며 한참이나 그곳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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