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개 너머의 꿈

나도 대학원에나 가볼까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백수가 됐다.


대학시절 사법시험을 보겠다는 뚜렷한 목표는 나를 법조인 대신 곧장 백수로 만들어 주었다. 법대 입학 후 언젠가는 사법시험을 보는 것까지는 장담하겠는데, 과연 어느 정도 수험기간을 거쳐 합격할 수 있을지가 문제였다.

법학개론 수업에 한자가 뒤섞인 법전은 외계어나 다름없었고 법률 케이스마다 갑.을.병.정을 세우고 답을 찾는 것은 어려웠다. 아니 각각의 의미를 법조문에 따라 이해하는 것을 겨우 할 뿐이었다. 그런데 시험이라는 것은 저 복잡한 문제를 단 시간내 풀어야하는 것이란다. 아직 신입생이라서 특별히 어려워 보이는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가능할까?

이런 류의 생각을 종종 하면서도 막상은 대학에 왔으니 해보고 싶은 것은 일단 해봐야 하지 않겠냐며, 하나, 둘 씩 버킷리스트를 헤치우고 있었다. 어느덧 나의 찬란한 신입생 시절이 야금야금 지나갔다.

그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보면 어쨌거나 무언가라도 되지 않을까 하는 당시 법대생의 야무진 꿈은 막연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던 1학년을 마치고 난 어느 날 캐나다로 어학연수를 나서게 됐다.

당시 법대에서는 어학연수를 떠나는 선배나 동기는 없었다. 나는 중앙 동아리에서 알게 된 경제학과 선배를 보고 맘을 먹게 됐다. 취업을 염두에 두고 어학연수를 떠난 선배의 권유를 듣고 보니, 나도 본격적으로 고시 공부를 하기 전에 잠시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지금에 와서야 돌아보면 당시 캐나다행을 결심한 것은 나의 모호한 플랜 A를 착수하지 못할 것이라는 마음의 준비이자, 플랜 B를 위한 신의 준비였다.


캐나다 동부는 내 생각보다 훨 더 추운 곳이었다.


영하 30도 이하로 떨어지는 캐나다 동부의 날씨는 듣던 것 보다 강렬했다. 속눈썹과 콧속이 얼어붙을 지경이었고, 두툼한 청바지 안에도 바지를 입는 날들이 꽤 많았다. 거센 추위 때문일까. 외국에 나왔다는 새로움과 기쁨은 크지 않았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유예기간으로 생각했던 날들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교외에 나가서 몇 명의 캐너디언이 섞인 유학생 무리와 어울렸는데, 그 마저도 나에게 딱히 매력적인 시간이라기보다 거쳐가는 시간 정도로 여겨졌다. 나와 달리 캐나다에 어학연수로 온 또래들은 모두 그곳에 어떻게 해서든지 더 있고 싶어 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좀 더 적극적으로 그곳에서의 삶을 찾아보았더라면 어땠을까? 지금의 내 자리에 과연 있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일어난다.

다시 서울로 왔을 때는 월드컵 16강 진출에 대한민국 땅이 후끈 닳아 오른 지 얼마 안 된 시기였다, 아직도 스물 초반, 여유가 있었다. 그래도 연애만 하고 학점만 메꾸기에는 아까운 시간들이었다. 흐릿해진 꿈을 찾기 위해 학교에 나가면 두꺼운 민법 교과서를 법대 도서관에서 몇 시간 껴안다가 집에 돌아오곤 했다.


4학년 2학기, 늦은 저녁 학교는 춥고 남은 자는 처량했다.


7시 이후에 학교 도서관에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학생들이 빠져나가는 학교는 처량하고 추웠다. 형광등 아래 뿌예지는 깨알 같은 법서의 글씨들은 머릿속에 박히기도 전에 눈 밖으로 떨어져 나갔다. 그 기분이 싫어서 늦은 시간 학교에 남아있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간을 흘러갔고 결국 4학년의 문턱을 넘고야 말았다. 한국은행, 산업은행 등 내놓으라는 은행을 비롯해 차즘 삼성을 시작으로 캠퍼스 리쿠르팅이 시작됐다. 내놓으라는 국내 국책은행에서의 캠퍼스 리쿠리팅 안내문에는 " 국내 최고의 은행으로서 처신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정도의 처우" 정도의 글귀를 본 것 같다. 그 글귀 때문이었을까, 번쩍번쩍 빛다는 여의도의 금융가로 가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렇게 대학 4학년에게 찾아온 취업의 문은 나에게는 꽤나 낯선 광경들이었지만, 당시 옆에 단짝 친구가 입사지원 서류를 준비하느라 토익 점수를 챙기는 모습이 나를 하염없이 흔들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때마침 부모님으로부터 통보가 내려졌다. 아빠는 나에게 요새 고시 붙어도 별거 없지 않냐면서 취업을 권하셨고, 나는 흐리멍덩해진 내 꿈을 붙들며, 부모님을 탓해보았다. 그 시절 법대 도서관 계단에서 세상이 마치 끝난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곤 했다. 어디 한번 원껏 해봐라. 하며 부모님이 판을 깔아줘야만 했던 고시공부라면, 사실은 나도 배짱이 없었던 게 아닐까. 사법시험이라는 끝을 봐야 끝이 나는 여정에 함부로 발을 내딛기가 두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때까지도 취업을 생각해보지 않았었다. 아빠 말씀처럼 그래, 지금은 이것이 최선이 될지도 몰라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4학년 2학기로 넘어갈 때쯤에는 새롭게 취업을 준비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으로 생각됐고, 12월 종강을 앞두고 취업문은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당시에도 취업문은 좁았다. 100:1은 기본으로 넘어가는 경쟁률을 뚫고 내놓으라 하는 대기업의 인사팀이나 법무팀에 들어가는 친구들은 많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앞을 지키고 살고 싶었던 나는 그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조바심이 낫다.


졸업, 금메달 은메달 동메달


그런데 그 조바심은 동기들보다 뒤쳐지느냐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럭저럭 크게 문제 되지 않을 취업 스펙을 갖춘 취업준비생은, 일단 졸업을 해버리고 나면 취업시장에서는 절대 유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 번 놓친 사회로 가는 배는 두 번 다시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두려웠다. 지금 생각해도 합리적인 두려움이었다. 이뤄놓은 것 없이 졸업식에 가는 것이 싫었다. 당시 여대생이 졸업 시 남자친구와 취업 두개다 성취하면 금메달, 취업만 하면 은메달, 남자친구라도 있으면 동메달이라는 우스개소리가 있었다. 나는 동메달리스트였다.

마치 그렇게 사회로 향하는 마지막 배를 떠나보낸 기분이 드는 졸업 후 봄은 정말이지 얼굴을 들기 힘든 시기였다. 2월의 졸업식의 교정에 기분 좋게 갈 수 있을까를 끝나버린 대학생활의 마지막 겨우 내 생각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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