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길이 아닌가

나도 대학원에나 가볼까

이사 같은 사원


요새는 금수저 흙수저 이야기도 많지만, 당시에도 부모의 든든한 배경이 아니면 알량한 대학교 졸업장 하나로 새가 돼 날아갈 방법은 딱히 없었다.

반복되는 엇박자를 내면서 숨이 넘어갈 것 같을 때 즈음 난데없이 여의도 금융가로 입성하게 됐다. 그 전에 숱한 입사 시험과 면접을 보았지만, 이 번엔 그 어떤 부담도 없었다. 오히려 면접을 보러 가던 첫날, 법학 공부가 아닌 취업?이라는 다시 또 원점인 그런 선택을 하게 된 자신이 못 미더워 발걸음을 돌이키고픈 마음이 수 번 들었다.


이전에 최종면접에서 미끄러졌던 A은행 앞을 지나칠 무렵엔 당시의 고생과 성취감, 그리고 곧장 절망으로 꾸려진 취업기의 꾸러미가 열리며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생기기도 했다.


날이 한참 따뜻해져서 겉옷이 필요 없게 된 어느 봄날, 1주일 새 모든 전형이 일단락됐고 난 내 힘으로 당당히 첫발을 내딛게 됐다.


'그래, 일단 해보자.' 사회에서 인정하는 최소 경력은 만들어놓고 내 힘으로 공부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가 오겠지.

고시는 그때 해보자.라고 생각하면서 법무팀에서 차곡차곡 회사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그러고 나서 1년이 넘어서는 엑셀 데이터를 만들었다.(재정적인 것들을 사전에 가늠하기 위해서였다.)힘들게 들어간 곳이었지만, 앞으로 직급이 대리 정도 되면 회사를 정리할 계획였다. 회사 생활이란 뭔가 100% 성취감을 주기엔 역부족이던가. 아니면 아무에게도 그 끝이나 비전을 배우지 못했다.


그렇게 시작된 첫 직장생활을 마칠 때까지 통장잔고와 경력, 예비 공부의 진도를 체크해 나갔다. 회사생활은 힘들고 긴장되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잘해주시려고 했지만 법무와 컴플라이언스 조직은 나보다 열살 이상된 4,50대 아저씨들의 조직이었다. 정장 스커트를 입고나간 날엔 다리가 퉁퉁 붓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들은 점심 때도 다리를 어떻게 둘지 몰라 애매하게 앉아야만 하는, 신발벗고 앉아 먹는 식당에 아무렇지 않게 갔다. 오후가 되면 지겹도록 피곤하고 졸음이 몰려왔지만 화장실에 가서야 파김치가 된 나를 마주할 뿐 어디 한 곳에 몸을 눕히기도 어려운 생활들이었다.


지금의 오십 대들이 MZ세대를 보며 느끼는 기대일지도 모르겠는데, 윗 세대는 아랫 세대를 향해 마치 영어에 관해선 네이티브인 줄 안다. , 우리 때랑은 다르잖아. 하면서. 혹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일까?

당시 회사는 국내기업이 외국계로 인수된 산태로 유학파들이 잘나갔다. 고전적인 법무팀에서 신입인 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영어와는 거리가 멀었고, 그나마 영어 업무를 하던 과장님의 이직으로 부장님은 나를 국적이 저마다 다른 임원들의 회의에 코디로 넣었다. 마음에 큰 부담을 갖고 이사회 코디 업무를 겨우 해내자, 곧 전임자가 했던 것에 서너배를 더 추가해 경영진 회의업무를 늘려주셨다. 요일 아침마다 외국인 임원진의 금융 이슈 미팅이라니! 분에 나는 아침 7시에 회사앞 스타벅스에 들르게 됐다.


임원회의가 업무의 절반이 되자 서 막내인 나의 별명이 '이사 같은 사원'됐다.

지금도 생각나면 미소가 떠오르는 분이지만, 십 년 터울인 선배는 맛있는 것은 사줬지만, 업무를 도와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이해가 됐다. 내가 회사에 적응해갈 무렵 어느 날부터 일까. 깔끔한 성격인 선배의 책상에는 먼지가 쌓여나기 시작했다.

선배가 더 이상 소송기록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의 텁텁하고 씁쓸한 것들, 당시 선배가 회사와 형처럼 따랐던 부장님에 대해서 느끼는 배신감과 소외감이 그런 게 아니었을까. 그들 각자의 사정은 있었다. 어린 였지만 내가 겪을지도 모르는 십 년 뒤 시간들에 대한 간접 경험이겠거니 했다. 물론 나는 선배처럼 회사에 계속 머무르면서 직장인 B씨로 남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의 처지에서 더 노력할 게 무엇이겠냐 싶었다. 나라도 그럴 것 같다. 하는 마음에 그를 응원하기도 했다.


여의도역 5번 출구


지금은 굳이 떠올리지 않으면 생각도 나지 않는 길이지만,

여의도역 5번 출구에는 던킨 도넛이 있었다. 그 던킨이 지겨워질 무렵 계획대로 나의 사회초년기 직장생활 시즌 1을 마치게 됐다.

계획대로 실행하는 것은 좀 멋져보이지만, 직장인이 직장을 그만두는 것은 유일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권한이다.

동생과 함께 떠난 미국 방문으로 모아돈 돈을 좀 쓰고,

나는 회사를 그만두고 사법시험을 준비하러 신림동에 들어갔다.


10개월 뒤 채점을 해보니 민법과 형법은 점수가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헌법은 진도를 다 못 마치고 들어가는 불상사가 생겼다. 마지막 주에는 판례집이라도 보기는 했지만, 헌법은 과락에 가까운 점수였던 것 같다.


사법시험은 곧 없어질 시험이었기에 나는 10개월이라는 배수진을 쳤고, 다시 시험에 도전할 생각은 깔끔하게 접었다.

어쨌거나 최선을 다했고,

정작 내가 궁금했던 것은 늘 적당히 해오던 것 말고

내가 얼마나의 속도와 집중력으로 달려갈 수 있는 사람인지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시험에 낙방했지만, 저 후련한 감정을 마지막 교시를 마치고 자리를 정리하고 나오면서 느꼈다.


그런데 쌩뚱맞게도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다름아닌

시험 준비를 하던 24시간 운영되는 독서실에서 내가 마주한 헌법 판례에서 본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누군가는 말장난이요. 정치적인 수사들이라 할 수 있는데 나에게 만큼은 반짝거리는 최고의 문장들이요 논리들이었다.

아 다시 태어난다면, 이 공부를 해보면 좋겠다.

나도 저들처럼 헌법재판관이나 연구원이 되면 좋았을 것 같다! 하는 생각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새벽 늦게까지 지나치게 공부를 하다 보니, 참으로 별 생각이 다 드는 것인지 싶었지만 그 이후에도 그날의 감정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마치 어둠 속에서 별을 본듯한 기분이었다.

뭘까 이 감정은. 나는 이 비밀스러운 기분을 다시금 몇 년 뒤 재취업 후 시간이 흘러서야

소환해 낼 수 있었다.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행운이었다.


대신에 헌법재판소에서 꽤 멋진 상을 받았다.


그 뒤로 시간이 흘렀다. 십 년 즘 흘렀으려나! 헌법재판소에서 시상식을 갖게 됐다.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와 관련해 나름 의미 있는 큰 상을 받게 되는 일도 생겼다. 학교 때는 옆의 엄마들 치맛바람과 여러 가지 이유로 맘에 흡족한 사진을 받지 못했는데 이리 격려해주시니 너무 감사하고 값지다!

내가 대학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주 오래전 신림동 독서실에서 헌법 판례집을 보고,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고 시간을 보내고 있지 않을까!!

배는 출항할 때와 정박할 때가 있다.

어쩌면 정박하는 시간이 더 길 수도 있으리라.

그래도 그 시간 동안 멋진 다음의 항해를 위해서 준비하고 꿈꿀 것이다. 이 다음의 항해를 기대한다.

@ 항구에 정박한 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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