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이 주는 묘미는, 매여있던 현실에서 나와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한참 사회활동을 하는 나이인지, 이제는 공인들이 많은 장에 나도 발을 딛었기 때문인지 시차가 무려 14시간이 나는 곳에 왔는데도, 한국의 아침과 저녁에는 카톡이 부산을 떨고 있다. "카톡! 카톡" 하는 알람을 무음으로 했는데도, 음성지원이 될 만큼 나는 한국의 일정과 일들에 여전히 연결돼 있었다. '고맙다. 진정한 connected life여!'
사람이 자기가 살고 있는 현실에 발을 떼고 나면 완전히 자유로울 것 같지만,
가진 게 제법 많아져서일까. 나의 의식은 지나온 현실의 "그래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해야하나"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재성으로 전환하자
22년만에 찾은 캐나다를 눈앞에 두고 지구 반바퀴떨어진 곳에서 하물며 72여 시간 전에 일어난 일을 해석하려고 하는 나의 미물적 한계를 느낀다. 실제 그럴만한 일인가 싶지만, 들여다보면 기회가 될 일이다. 지금의 것을 그만하거나 다른 곳을 향하거나 혹은 방향을 틀 수 있는 시점이란 뜻이다.
그럼에도 지금은 올해 가장 중요한 동생네와의 시간이며, 큰 값을 주고 산 귀한 여정이다. 이렇게 정신을 차리려고 스스로 말도 해본다. 신체의 고통과 마찬가지로 스크레스도 일련의 일들이 대한 몇 번의 확인 끝에는 완전히 돌이킬 수 있었다.
@창밖 토론토 시내
눈앞을 가로막는 먹구름이 있을 때는 생각의 정리, 앞으로 궤적을 가늠하기 위해서는 타이핑, 필기도구를 찾게 된다. 생각을 굳이 언어로 남겨야 하나? 는 의문도 들지만, 생각의 정리에 글쓰기만큼 탁월한 것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이놈의 생각이라는 것이 늘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저 연기와도 같은 것들이 대부분이기도 하니!. 그에 비해 생각의 정리는 내게 일어난 것들과 흩어진 생각의 파편들이 어디로부터 연유한 생각인지 가려내는 일들이다. 그것들이 긍정적이고 필요한지, 나를 교란시키는 영적인 영향력인지를 가려내는 것이다.
근래의 일들은 내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나를 방해하는 것들일까? 나를 성장시키려는 길목에 놓인 시험일까. 이토록 헷갈리는 이유는 감정과 과거로부터 학습된 것들 때문이기도 하다.
과거의 편향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은 인공지능뿐만 아니라 인간인 나 역시 그렇다. 아니 더 그런지도 모른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과거의 것들로부터 미래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단 한 가지 과거로부터 결정할 수 있는 것은 나의 태도일 뿐이다. 겸손과 인내와 기대함에 대한 존중은 과거로부터 내가 확신을 갖는 것들이다.
질주하는 트럭 옆에 있었던 까닭일 뿐
운전을 하게 되면서 짐을 잔뜩 싣거나 종횡무진으로 질주하는 큰 차는 가능한 피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체득하게 됐다. 하지만 변경할 차선이 허락치 않거나 터널 안이라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가야할 때도 있다.어릴 땐 세상에 이렇게 이상한 사람이 많은지 알기가 힘들었는데, 어른이 되니 그런 사람들을 마주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처하기도 하는 것은 나만은 아니다. 특히 스스로 경쟁구도를 만들고 불안감에 시달리는 경우에는 아무나 붇잡고 토하고 불을 뿜고 자멸하기도 한다.
나는 그런 사람들의 증상과 끝을 몇 번의 경험을 통해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의 여정
신은 나에게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한다. 사람인 내가 신과 같은 삶의 태도를 갖는 것이 가능할까? 하지만, 언젠가부터 나는 삶의 태도를 분명히 하기로 했다. 어정쩡하게 있다가는 정리가 안되는 삶을 살 것 같아서이다.
토론토에 머무는 동안 기도 노트를 따로 만들었다. 더럽혀진 나의 공간을 정돈하고, 정제된 가치들에 집중해보기 위해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