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형 인간인 나의 경우 가장 피로도가 높은 시간은 오후 시간이다. 일본에서는 오후 3시면 간식 시간(산지노 오야츠, 三時のおやつ*)을 갖는다는데, 나의 직장생활에도 이 같은 쉬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늘 생각해왔다.
6살 무렵 내 꿈은 화가였다. 어린아이의 꿈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스케치나 물감을 제법 쓸줄 알았던 것 같다. 그 뒤로 학년이 올라가면서 꿈은 바꼈고, 고1 이후로 물감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내게 있어 그림 그리는 시간은 아무 걱정도 염려도 없고, 계획도 없어도 되는 시간으로 기억됐다.
'여유가 생기면 그림을 한번 그려봐야지!' 한 것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이다. (인간이 한 번 가던 길을 유턴하려면, 이렇게 강렬하거나 잔인한 신호가 와야 하는 것일까!)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20년 묵힌 생각이라고 하기엔 실행하는 것은 한 순간였다. 물감을 살 만한 곳도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집 밖에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는 위치에 있는 알파문구! - 문구점이란 이렇게 고마운 것이다. 가서 보니 없는 게 없는 보물 창고라고 할까- 8월 마지막 주, 땡볕이 내리쬐는 오후에 선글라스를 걸치고 대낮에 물감을 사러 나가는 기분이란! 미술도구를 사는 것은 20년도 한참 지난 일이다.
열 개짜리 물감과 팔레트, 붓 하나를 골랐다. 아, 그리고 스케치북도 있어야 한다.
스케치북 고르는 것이 가장 어려운 것 같다. 꽤나 다양한 종류가 있는데 30여 장 있는 제일 만만해 보이고 값싼 것을 골랐다. 오늘 하루하고 안 할지도 모르니까.
때마침 롯데백화점 지하에서 쿠키 살 때 받은 원통 플라스틱도 있었다. 물통으로 하기에 제 격인 사이즈이다.
그야말로 오늘의 숨을 쉬기 위한 준비였다.
물감과 붓은 들었지만 막상 뭘 그려야 할지 고민이 됐다. 늘 눈에 잘 보이고 익숙한, 편안한 기분이 드는 그것을 그려보라는 동생의 말이 떠올랐다. - 동생은 회화를 하고 싶어 했지만, 홍익대 산업디자인과로 진학했던 아이다. 최근에는 조카와 함께 자투리 시간에 그림을 조금씩 그린다고 했다.
20여년 만에 붓 끝에 물을 톡톡 묻혀 가면서, 튜브에서 짜낸 물감을 섞고 있으니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듯하다. 색을 입히다 보면, 엄청나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야~~~~'
1. <그리기 준비>간단한 도구와 철마다 시켜먹는 한라봉 시리즈를 재료로 골랐다. 이번엔 천혜향과 집에 둔 식물을 대강 스케치해보았다. 4B 연필은 없어서 그냥 B 시리즈 아무 연필을 가지고 그린다.
2. 그림 1호
막 그리다.
생각보다 개운죽을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사실 이 그림은 개인적으로는 제일 안 좋아하는 그림일 정도로 막그림였다. 변명이지만 이렇게 못 그리는 편은 아니다. 그럼에도 공개하는 것은 브런치야 말로 내 일기장이기 때문이다.
식물의 잎은 오묘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여러 방향으로 꼬여있기도 하고 모양도 색도 제각각이다.
나 혼자 하는 미술시간이라니 !
여유가 뿜 뿜 넘친다. 서툴은 첫 그림을 그리는 동안 그간 돌보지 못했던 나를 만나고 있었다.
'이게 진짜 쉼이구나' 평소에 내 주변에 있는 사물들을 여유있게 살펴보니 정말 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 번에 다 그리지는 않는다. 늦은 오후에 1시간 반 정도 그림을 70%정도 대강 그린다. 다음 날 아침에 물감이 마르면 그때 바탕을 칠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여정이다.
못난이 그림이지만, 어디에 낼 것도 아니고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니고, 그냥 내 마음과 바쁘게 뛰어오느라 들여다보지 못했던 내면을 챙기는 시간이다. 그간 여행으로도 놓쳤던, 숨 쉬는 시간에 대한 빚을 이제 갚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