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충분한 사랑과 지지 속에 자존감으로 채워진 어린 시절 보낸, 사람이 아니다. 따스한 가족과의 추억보다는 깊은 불안과 슬픔에 얼룩진 기억이 더 많다. 다른 사람을 잘 믿지 못하고 나 조차도 믿지 못하는 불안 회피형 애착. 밝고 당당한 내 껍질 안에는 이토록 자라지 못한 아이가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아이는 자신을 숨기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열심히 해왔다.
아이를 낳기 전에는 일 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지만 사람을 기르는 일은 나를 내어 놓아야 하는 일이기에 육아를 시작하며 나는 번번이 내 한계에 부딪혔다. 아직 나를 돌보는 방법도 잘 모른 채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잘 될 리가 없었다. 버겁게 이어가던 육아 또한 인정받지 못한 자아를 덮기 위해 바지런히 노력으로 해 왔던 것 같다. 돌아보니 아이들과 행복했던 추억이 너무나 많았는데도 그 순간들 속에는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내 어린 시절의 슬픈 감정이 앙금처럼 남아있다. 아이들에게 이런 뿌연 감정은 나는 충분하지 않은 엄마라는 마음을 불러왔고 그래서 아이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품기보다는 애쓰고 노력하는 부분이 더 크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토록 불완전한 나를 안고 아이들을 기르며 내 일을 만들어 간다. 어느 순간 이것이 한번에 해결될 수 없음을 인정하고 오늘보다 내일 조금만 더 나은사람이 되자 마음먹으면서 말이다. 먹고살자니 어쩔 수 없어서 혹은 이런 내 허전한 감정을 채우고 싶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나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더 마주할 수 있어서 이 길을 걸어간다.
아리스토텔리스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어떤 부모의 자녀가 되는 데서보다는
어떤 자녀의 부모가 되는데서 더 큰 즐거움을 느낀다고 말했다.
@ 부모가 된다는 것의 철학 중
아이들을 기르면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나의 인간성을 마주하며 나 같은 이가 용서받고 매일 새 마음을 공급받을 수 있음에 감사하고 무시하고 덮어버렸던 내 안의 수많은 감정들이 새 생명을 얻고 조금씩 내 안에 뿌리내릴 수 있음에 감사한다.
만약 나에게 아이들이 없었다면 이토록 썩어있는 마음의 구석을 발견할 수 없었을 텐데 아이들이 나에게 상처 받은 표정이, 슬픔에 흘리는 눈물이 같은 상처와 슬픔 속에 울고 있던 나를 마주하게 한다. 나는 좋은 엄마는 될 수 없지만, 내 아이들은 참으로 좋은 자녀라서 내가 그 덕에 엄마 노릇을 할 수 있어 감사할 뿐이다.
이렇듯 엄마로의 삶을 통해 정서적인 성숙을 바라며 나아가는 삶은, 일을 통해 세상이라는 곳을 만나 이전과 또 다른 통찰을 선물로 받게 해주는 것 같다.
부족하지만 사랑받기에 합당한 나에 대한 믿음이 타인에 대한 믿음의 끈을 연결 하고 내가 필요한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준다. 일을 통해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찾으며 삶에 생기를 더하고 때로는 인정을 때로는 충고를 받으며 내 안의 발견하지 못했던 감정과 생각의 결들을 찾아가며 단단한 나를 만들어간다. 다만 시간이 좀더 걸릴뿐이다.
아이들 방학과 병치레로 정신없었던 지난 2주간 사실 공부를 거의 집중하지 못했다. 그 시간을 회고하며 나 스스로에게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다 보니 내 마음의 이야기로 들어가고 말았다. 앞으로도. 수많은 변수로 인해 가던 걸음을 멈칫하게 될 텐데 자책하지 않고 조급해하지 않고 나의 속도를 인정해주고 싶을 때 꺼내어 보려 이렇게 글로 남겨본다.
오늘 혹시 나처럼 무엇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해결되지 않는 내 안의 감정들을 소화해 내느라 버거운 하루를 보내는 이가 있다면 나도 그 길에 함께 있노라고. 그러니 함께 가자고 손 내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