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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지 않을 권리를 주세요─디지털 파놉티콘

구글링의 피해자들과 영화 「제이슨 본」

인간에게 망각은 생존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어, 우리가 스스로 기억하는 기억뿐 아니라 우리는 하나의 기억을 더 갖게 되었다. 그것도 영구적인.

사이버 공간과 디지털 저장 장치의 발달은, 우리에게 망각의 상실을 안겨다주었다.


#풍경 1.
2006년의 어느 날, 벤쿠버에 사는 앤드류 펠드마(Andrew Feldmar)는 친구를 마중하러 가기 위해 백 번도 넘게 오갔던 미국-캐나다 국경을 넘으려 했다. 이때 펠드마의 이름을 구글링한 국경 경비대원이 1960년대에 그가 환각 물질 LSD를 흡입했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펠드마가 2001년에 기고한 논문에 언급된 대목이었다. 거의 40년 전의 과거 한 조각 때문에 펠드마는 네 시간 동안 억류당해서 지문을 찍고 마약 전적을 인정하는 진술서에 서명한 뒤, 미국 입국 금지 통보를 받는다. 펠드마는 1974년 이후로는 범죄 기록상 마약을 일절 투약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풍경 2.25살의 ‘싱글맘’이었던 스테이시 스나이더(Stacey Snyder)는 대학 과정을 마치고 교사가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대학 당국의 호출을 받고 참석한 자리에서 그녀는 교사가 될 수 없다는 통보를 받는다. 교사 자격에 필요한 모든 요건을 갖춘 그녀가 교사 자격증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과거 그녀가 해적 모자를 쓰고 플라스틱 컵에 술을 따라 마시는 모습을 담은 사진에 '술 취한 해적'이란 제목을 붙여 마이스페이스 페이지에 올렸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올렸던 사진 한 장이 홀로 아이를 키워내며 착실하게 공부한 그녀의 현재를 뒤바꾼 결정적 요소가 된 것이다.


당시 스테이시 스나이더가 'Drunken Pirates'라는 제목으로 게시했던 사진.



유사 이래 인간은 망각으로 인한 오류나 취약함을 극복하기 위해서 다양한 기억 보조 장치들을 발달시켜왔다.

그런 보조적 장치들은 오류나 실책을 범하는 인간을 바로잡아주는 평형추의 역할을 했다. 

적어도 아날로그 방식이 주된 기억장치였던 시대까지만 해도 그랬다. 

디지털 방식으로의 전환으로의 전환으로 인해 망각과 기억 사이의 균형이 깨진 채 기억하는 일이 더 쉬워졌다. 

디지털 저장 장치들이 저렴해지고 누구나 손쉽게 검색할 수 있으며, 전 지구적으로 접근이 용이해졌기 때문이다. 


태평양 너머 사례들이 낯설다면, 우리나라에서 몰래 촬영된 성관계 동영상 때문에 고통받는 여성들의 사연을 떠올려보면 쉽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록 삭제 업체를 찾는다.

국내 1호 디지털 기록 삭제 업체 산타크루즈컴퍼니에는 예전 남자와의 과거가 두려운 여성, SNS에 올렸던 글 때문에 곤경에 처한 취준생, 성관계 영상이 유출돼 곤욕을 겪는 커플 등이 주된 고객층으로, 하루에 300건 정도의 상담 전화가 걸려 온다고 한다.


망각은 사회적 차원에서도 핵심적 중요성을 갖는다. 


망각은 실패한 개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파산을 하고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은 사람도 세월이 흐르면 잊혀진다. 

과거의 잘못을 거울삼아 보다 더 나은 미래를 만들려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망각과 외부 기록 삭제는 성숙의 계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디지털 금욕주의자가 되지 않는 이상, 디지털 시대의 사람들에겐 이 같은 망각의 혜택을 누릴 기회는 거의 없어 보인다. 

아무리 사소한 실수라도 그 흔적을 지워낼 수 없으니 관용이나 용서도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 보니 현재의 삶이 과거의 기록에 묶여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인터넷이나 SNS에 남긴 한 구절의 말, 그리고 추억의 사진 한 장이 보다 현재의 개인 정체성을 제약하고, 또 심지어 새로운 삶의 기회를 빼앗기까지 한다. 


우리에겐 ‘잊혀질 권리’가 필요하다.



‘잊혀질 권리’는 지난 2010년 스페인의 변호사 마리오 코스테하 곤잘레스(Mario Costeja González)가 스페인에 사는 곤잘레스를 검색하면 나오는 기사 내용을 구글에서 지워달라고 소송을 제기하면서 시작되었다. 

곤잘레스는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면 사회 보장 채무의 집행을 위한 압류 소송과 관련된 부동산 경매를 다룬 기사가 링크되어 수모를 겪었다.

곤잘레스는 이 정보가 현재의 이미지에 손상을 준다며 구글에 ‘곤잘레스’와 관련된 개인 정보가 검색 결과에 포함되지 않고 더 이상 해당 신문으로 연결하는 링크에서도 나타나지 않도록 제거하거나 숨길 것을 요구하였다. 

수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곤잘레스는 재판소로부터 기사 원문을 지울 수는 없지만 구글 검색 결과에서는 보이지 않게 조치하라는 판결을 얻어냈다.


이 사건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오래된 미래’의 섬뜩한 교훈을 들려주고 있는 듯하다.

곤잘레스가 맞서 싸운 구글의 세계는 18세기 말 제레미 벤담이 생각해낸 파놉티콘(panopticon)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윌리 레블리, 「제레미 벤담의 파놉티콘 교도소의 입면도, 단면도 그리고 도면」(1791)


파놉티콘은 죄수들의 효율적인 감시・감독을 위해 설계한 원형 감옥으로, 여기에는 간수가 누구인지 수감자들이 볼 수 없도록 감시탑의 내부를 가리는 정교한 블라인드 장치가 있다. 

역광으로 죄수들의 모든 행동뿐만 아니라 유형까지도 분명하게 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분리된 감방들을 반원형으로 배치했다. 

중앙 관제탑에서는 전체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지만 감시를 당하는 수감자들은 감시자들을 알아볼 수 없는 불균형의 구조로 설계되어 있는 것이다. 

이 구조 속에 있는 죄수들은 자신들이 항상 감시를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감독관 측에서 보자면 적은 인원으로 효율적인 감시와 통제가 가능해진다. 

그것도 24시간, 전방위에서 말이다.


『잊혀질 권리』를 쓴 옥스퍼드 대학교의 빅토어 마이어 쇤베르거는 사이버 공간이 21세기판 파놉티콘이라고 말한다. 

디지털 방식으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지는 사이버 공간이 일종의 통제 구조로 되어 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21세기의 특수한 파놉티콘 구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통제 방식은 벤담식과 다르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성원들은 그 구조를 유지하는 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기여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페이스북, 카카오톡과 카카오스토리 등등 다양한 인터넷 공간에 자기를 노출하고 과시하며 파놉티콘 건설에 능동적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제 손으로 개방한 자신의 사적으로 은밀한 영역이 망가질까 걱정하지만, 사적 공간을 밀폐할 경우 외부와 정보를 공유할 수 없어 고립되거나 격리될 위험이 있다. 

정보의 부재는 곧 시대의 낙오를 뜻하는 디지털 시대에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열렬하게 제 자신의 정보를 노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의 정보를 얻고 다른 세계를 염탐하며 디지털 파놉티콘 건설에 기여한다. 


디지털 파놉티콘의 구성원들은 휴대폰으로 통화하고, 인터넷으로 주문이나 예약을 하고, 또 자동화된 은행 이체 서비스를 사용한다.

그 모든 클릭이 저장되기에 우리가 내디딘 발자취는 역추적될 수 있다. 

스스로 도처에 남긴 디지털 족적들을 통해, 우리들의 역사가 네트워크 안에서 정확히 모사된다. 


『투명 사회』에서 한병철이 지적하듯, “투명성은 폭력이다”. 


노출되면 위험이 뒤따르거나 노출된 이의 삶에 치명타가 될 때도, 디지털 파놉티콘의 완전한 조명으로부터 그것을 막아낼 선택의 자유는 거의 없다. 

특히 보는 쪽이 국가 권력일 경우, 그 가능성은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다.

2016년에 개봉한 영화 「제이슨 본」은 바로 그 경우를 생생히 그려낸다.

「제이슨 본」은 미국 첩보 영화 ‘본’ 시리즈의 네 번째 영화로, 전작 세 편에 걸쳐 본이 기억을 회복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음으로써 사실상 ‘본’ 시리즈가 종결되는 듯했다.

하지만 「제이슨 본」에서는 본에게 아직 풀리지 않은 마지막 기억, 본이 어떻게 제 스스로 CIA의 인간 병기가 되었는가 하는 문제를 제시한다.


CIA의 인간 병기가 된 계기가 그의 아버지와 관련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한 본은 그 정보를 열어봄과 동시에 살해의 위협에 노출된다. 

영화에서 펼쳐지는 추격전에서 우리는 디지털 파놉티콘의 암울한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정보의 독점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막강 권력체 CIA는 텔레스크린으로 쉴새없이 본의 행적을 뒤쫓는다. CIA 컴퓨터에 범죄자 식별용으로 등록된 그의 얼굴 사진을 기반으로 인터넷, CCTV, 블랙박스 영상, 캠코더, 그리고 심지어 접근 가능한 통신 위성 들은 본의 움직임을 포착해서 영상으로 보여준다. 

본이 인터넷 접속을 하거나 CCTV가 있는 곳에 노출되거나 블랙박스가 있는 차량 앞을 지나거나 다른 사람들과 통화를 할 때면, 어김없이 그의 행적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시선에 포착된다. 

그의 과거 행적을 모조리 삭제하지 않는 한 이미 범죄자로 낙인찍힌 본이 그나마 평범한 디지털 파놉티콘 주민으로 살아가는 일은 불가능해진 것이다. 

본은 디지털 세계와의 분리와 고립을 그의 가능한 생존의 형태로 선택했다.



최근 미국에서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페이스북 계정을 지우는 방법에 대한 수업을 의무적으로 받고 있으며, 카카오톡 감청 우려에 많은 '디지털 난민'들이 해킹 위험이 없다는 텔레그램으로 '이주'한 현실은 「제이슨 본」에서 본이 자유의 공간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상황과 다를 바 없다. 

곤잘레스는 보다 적극적인 방법으로 디지털 파놉티콘 체제에 저항했던 것이다.

하지만 구글의 세계에 족적이 찍히면 어느 한 부분도 지워져서는 안 된다는 구글의 위압에 최소한의 디지털 공터를 확보했을 뿐이다.


가까운 미래에는 구글과 같이 막강한 힘과 권력을 가진 디지털 파놉티콘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토탈 리콜’과 투명성은 디지털 파놉티콘의 체제의 존재 근간이다. 

삭제로 인해서 정보 공백과 불투명성이 초래되면 그 체제의 존재 이유가 의심을 받기 때문에 디지털 파놉티콘 체제에서 삭제(망각)는 허용될 수 없다. 

그만큼 미래의 수많은 곤잘레스들, 본들 그리고 디지털 유목민들에게 막강한 디지털 파놉티콘 체제와 맞서 싸울 방편이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8권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서길완 著)에 수록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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