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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불안을 수반한다─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역설

오스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

사랑은 어렵다.

누구나 쉽게 사랑에 빠지고 흔하게 사랑을 하지만, 사랑의 과정은 만만치가 않다.

아무리 합리적인 사람이라도 젊은 시절 사랑 때문에 울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황홀하지만 고통스럽고, 아름답지만 갈등과 상처를 남긴다. 사랑의 과정은 복잡하고 모호하며 예측 불가하다.


사랑은 왜 어려울까?


그 어려움의 측면을 검토하지 않으면 사랑을 제대로 해내기가 어렵다.

사랑의 자연적 충동, 쾌락적 즐거움, 윤리적 가치라는 긍정적 관점으로 이해하는 것만으로 사랑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사랑은 구조적으로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자본주의는 사랑을 결혼 시장과 결부시켜 더욱 어렵게 만들어간다.

사랑에 내재하는 역설적 양가성이나 본질적 모호성, 그리고 사랑을 더욱 어렵게 만드는 사회적 구성 원리를 이해하지 않고는 사랑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 수 없다.


오스트리아의 표현주의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는
사랑의 역설적 구조를 잘 보여준다.


코코슈카는 19세기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비합리성으로서의 감정을 화폭에 담아낸 빈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화가이다.

‘빈 분리파’로 불리는 코코슈카 등은 성과 사랑에 특별한 관심을 두었다.

빈 분리파의 창시자 구스타프 클림트는 성적 관능을 생식세포의 상징적 도상으로, 에곤 쉴레는 노골적인 성과 권태를 동시에, 코코슈카는 사랑의 황홀과 절망, 기쁨과 고통이라는 양가적 구조를 격렬한 터치로 표현하였다.

코코슈카의 그림 「바람의 신부」를 꼼꼼히 들여다보자.


오스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1914). 


연인은 폭풍우 치는 바다 한가운데 함께 누워 있다.

거센 파도가 마치 아늑한 침대와 하얀 이불보처럼 이들의 벗은 몸을 덮어주고 있다.

이불 아래 드러난 몸은 이들의 격렬한 사랑을 흔적으로 남겨놓는다.

지금 막 사랑의 행위를 끝내고 여자는 편안하게 잠들어 있고, 남자는 밤하늘 어딘가를 응시하며 불안감에 빠져 있다.

여자는 한쪽 팔을 자기 어깨에 올린 채 스스로를 보호하는 듯 보이며, 남자는 자기 두 손을 억세게 마주 잡고 있다.

이들의 사랑은 격렬하지만 연약하고, 육체를 부딪치며 함께 있으면서도 자기를 보존하며, 아늑한 침대 속에 있지만 파도 위에 있고, 서로의 온기로 따뜻할 테지만 바닷물의 축축함이 온몸으로 밀려든다.


코코슈카는 이 그림을 「폭풍우(The Tempest)」라고 명명하고 ‘바람의 신부’라는 부제를 달았다.



그림의 주인공은 코코슈카 자신과 코코슈카가 사랑했던 알마 쉰들러다.

알마 말러로 잘 알려진 알마 쉰들러는 그 자신도 음악과 미술에 빼어난 재능이 있었지만 스스로 예술가가 되지 못하고 남성 예술가들의 뮤즈에 그쳐야 했다.

알마 쉰들러는 빈 모더니즘 시대의 유명한 남성 예술가들에게 구애를 받았던 젊은 여성이었다. 

 여성의 첫 키스 상대는 그 유명한 화가 클림트였고, 첫 결혼 상대자는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였다.

클림트의 그림 「키스」의 모델이 알마라는 설이 있을 정도다.


말러가 죽자 알마는 코코슈카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을 했다기보다 ‘빠졌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들에게 사랑은 지속으로서의 사랑이 아니라 격렬함, 솟구침, 열정적 고뇌, 상대를 위한 희생이거나 정복으로서의 사랑이었다.

지속성으로서의 사랑, 삶의 진리를 구축하는 사랑, 차이를 상호 인정하는 근원적 관계에 토대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코코슈카는 처음 이 그림의 제목을 ‘트리스탄과 이졸데’로 지으려고 했다고 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야기는 하녀의 실수로 사랑의 묘약을 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운명적 사랑에 빠지지만 결국 죽음을 통해서 사랑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켈트족 전설로,

중세를 거치면서 유럽 연애문학의 전형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단둘이서, 영원히’라는 불가능한 사랑을 이념화한
낭만적 사랑의 원형을 제공한다.


공교롭게도 로헬리오가 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구도와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 구도는 유사하다.

로헬리오의 그림은 먼저 죽은 트리스탄의 시신 위에 이졸데가 쓰러져 있는 구도다.

대지 위에 쓰러진 트리스탄의 몸 위로 반라 상태의 이졸데가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서로 손을 꼭 잡고 사랑스런 표정으로 잠자듯이 몸을 겹친 채 누워 있어서 풀밭 위 두 육체가 마치 조금 전 섹스를 끝내고 달콤한 잠에 빠진 것처럼 봄의 생기로 가득하다.


로헬리오 데 에구스키사, 「트리스탄과 이졸데」(1910)


「바람의 신부」의 인물 구도도 그와 유사하지만, 코코슈카 자신이기도 한 남자의 얼굴은 깊은 고뇌에 빠져 두 눈은 퀭하니 꺼져 있고,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대신 어두운 밤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그리고 서로의 손을 잡지 않았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초록풀이 돋아난 화사하고 포근한 대지 위에 누워 있지만, 코코슈카의 연인들은 폭풍우 치는 바다 위에 있다.

트리스탄은 죽음을 통해 사랑을 완성한 경지를 보여주지만, 코코슈카는 지상에서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채 살아남은 자의 고통을 전면화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죽었지만 사랑의 유토피아를 실현하였고, 코코슈카와 알마는 살아 있지만 디스토피아적 상황에 처해 있다.


코코슈카는 자유분방하고 굵은 붓 터치로 폭풍우 치는 바다를 강렬하게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무의식을 밝혀내는 데 프로이트와 쌍벽을 이뤘다고 자화자찬했던 코코슈카는 인간의 비합리적 내면을 탐구했다.

그는 아름다움, 합리적 외면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의 성, 무의식, 어두운 감정에 관심을 두었다.

따라서 코코슈카의 「바람의 신부」는 인간 몸의 아름다운 비율이나 시각적 묘사, 빛에 따라 변화하는 외부 세계의 리얼리티를 무시하고, 인간의 내면인 사랑의 이중성과 감정적 역설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였다.

굵은 선을 통해 바다와 인물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만, 그림을 자세히 보면 선은 연속적이지 않다.

뚝뚝 끊어진 불연속적 선들이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은 채 폭풍우 치는 바다 위의 연인을 그려낸다.


강렬하지만 고통스러운 사랑의 열정적 감정, 오르가즘 후에 밀려오는 알 수 없는 허무감, 사랑의 연대감과 관계의 휘발성을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코코슈카는 19세기 유럽의 수도 빈에서 재능 있고 매력적이며 인기 있는 알마를 옆에 두었지만, 알마가 자기 곁에 오래 머물 수 없는 사람임을 알고 있었다.

코코슈카는 알마에게 집착했고, 알마는 자신에게 얽혀드는 코코슈카에게서 평화를 느낄 수 없었다.

알마가 유산을 하고 코코슈카가 말러의 데스마스크를 부수면서 둘의 관계는 끝장난다.

코코슈카가 알마에게 얼마나 집착했는지는 그의 그림 「알마 인형과 함께 있는 자화상」을 보면 알 수 있다.


오스카 코코슈카, 「알마 인형과 함께 있는 자화상」(1921)


코코슈카는 알마를 닮은 사람 크기의 인형을 주문 제작하여 그 인형과 함께 생활했다.

인형을 돌볼 하녀를 따로 고용하여 드레스를 입히고, 침대에서 같이 자며, 심지어 마차에 태워 오페라 극장에 갔다.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애도를 그는 병적으로 겪어냈던 것이다.


그것은 알마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완전한 사랑에 대한 사랑이었을까? 자기애였을까? 아니면 표현주의라는 예술적 상황을 극적으로 연출한 것일까?

어쩌면 코코슈카는 지상에서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죽기 직전의 트리스탄의 내면을 그렸는지도 모른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을 꿈꾸었으나, 영원한 사랑에 이르지 못하는 자의 역설적 상황을 이 그림은 구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코코슈카의 비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을 완전한 사랑으로 인식한 데서 기인한 것 같다.

사랑은 일상과 삶 속에서 변화하고 상호 인정하는 둘의 무대라는 사실을 그는 사유하지 못했다.

그에게 완전한 사랑이란 두 사람의 열정이 변하지 않고 영원해야 한다는 이념적인 것에 가까웠다.

그것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염려는 현재의 사랑을 불행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알마가 지금 자기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코코슈카는 깊은 절망과 불행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스카 코코슈카, 「오스카 코코슈카와 알마 말러의 초상」(1912~1913)

사랑에 빠진 자들이 갖는 역설적 상황은 코코슈카가 표현한 사랑의 이중 구조와 유사하다. 

사랑에 막 빠진 커플들을 상상해보자.

그가 나를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아니면 잠깐 유희의 대상으로 삼으려는 건지, 이 사랑이 지속될지 아니면 곧 끝날지, 결혼을 해야 하는지 연애로 끝내야 하는지, 상대가 준 선물의 의미와 지금 한 이 키스가 어떤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 역시 변화무쌍하다.

아침에는 상대를 그리워하다가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절망에 빠져 헤어지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러다 오후에 그와 공원을 걸을 때는 귓가에 사랑의 종이 울려 퍼지고 그와 함께하는 시간이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헤어지기 몇 분 전 분명치 않은 이유로 티격태격 싸우다가 막상 집으로 돌아갈 때는 미치도록 서로를 아쉬워한다.


도대체 이 일관성 없는 자기감정과 변화무쌍하게 변하는 상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사랑에 빠진 자들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하다.


자기감정도 확정 짓지 못하는데, 타자인 상대방이 어떤 상태인지 가늠하기는 더욱 어렵다.

사랑에 빠져 열정적 상태에 있는 커플들의 내면은 코코슈카의 그림처럼 폭풍우 치는 바다와 같다.


연인들은 불안정한 감정 상태를 벗어나 안정감을 찾기를 희구하면서도 안정적 관계가 되면 곧 권태감을 느낀다.

자기 보존을 위해 강한 주장을 하면서도 상대를 위한 희생의 욕구를 동시에 느끼기도 하고, 상대 때문에 자기를 보존하기 어려울 땐 심각한 구속감을 느낀다.

때로 둘의 관계가 감옥처럼 느껴져 감옥 바깥의 자유를 원하면서도, 상대방이 강력하게 자기를 묶어주기를 동시에 바란다.


안정감과 불안정성, 구속과 자유, 희생과 자기 보존, 만남과 이별, 쾌락의 순간성과 지속적 연대감,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부드러움과 폭력, 더 사랑하는 자와 덜 사랑하는 자의 비대칭성, 사랑의 맹세와 미래의 불확실성, 사랑의 의지와 감정의 변화라는 역설들.


이처럼 사랑은 상반된 것들이 공존하는 역설적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사랑은, 특히 초기의 사랑은 해소할 수 없는 긴장감과 충돌의 에너지를 먹고 팽창한다.

그렇다면 사랑이 어려운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중적인 것이 공존하는 역설 구조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잘되지 않을 때 스스로 자책감을 갖거나 상대를 비난할 필요가 없다.

사랑의 주체들은 사랑의 역설적 구조를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사랑이 작동하는 법을 찾아내야 한다.


사랑의 속성은 역설적이고 이중적이며,
사랑은 근본적으로 이질적인 ‘타자’와의 연대이다.


사랑의 역설을 폐쇄적으로 가둘 것이 아니라, 역동적 삶의 에너지로 전환하여 사랑이 삶 속에서 생동하고 성장할 수 있도록 북돋워야 할 것이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9권 『사랑, 삶의 재발명』(임지연 著)에 수록될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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