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기록이 기억을 치유한다

트라우마적 기억을 서사적 기억으로─오드리 로드, 『암 일기』

생존자 본인이 트라우마를 능동적이고 생산적으로 이야기하여 치유하는 다양한 방식에는 증언, 이야기 치료, 그리고 나의 삶의 글쓰기 등의 형태가 제안된다.


특히 내 삶의 글쓰기는 최근 들어 트라우마를 이야기하는 용이한 방식으로
각계에서 환영받고 있다.


일전에 살펴본 강간 사건의 생존자 수잔 브라이슨도 자기-삶의 글쓰기를 통해 그녀의 트라우마를 ‘정면 통과’했음을 시사한다.


생존자의 자아는 일시적으로 능동적인(이야기하는) 주체와 보다 수동적인(이야기되는) 대상으로 나뉜다. 이렇게 되기만 해도 생존자는 트라우마를 겪으며 물건처럼 취급됐던 자아를 다시금 주체로 끌어올릴 수 있고 스스로에게 보다 많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성폭력이 있은 지 수개월이 지난 후 나는 간신히 내가 겪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쓸 수 있었는데, 쓰고 나서 그것을 읽었을 때 비로소 “말로 안 돼, 이렇게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니!” 하고 깨달았다.


자기의 삶을 씀으로써 외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또 다른 사람으로, 유방 절제술을 받은 시인 오드리 로드(Audre Lorde)가 있다.


오드리 로드.


오드리 로드는 미국 할렘가에서 태어나 극심한 인종차별의 고난 속에서 성장한 뒤,

성인이 되어 시인으로서 명성을 얻어가던 40대에 유방암을 진단받고 오른쪽 유방을 절제하는 수술을 받았다.


유방암 투병과 절제술을 받은 경험은 인종차별과 또 다른 차원의 고통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너무도 많은 여성들이 로드와 같이 유방암에 걸려 절제술을 받기에 로드의 경험이 그리 특별해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녀와 같은 질병 경험이 고통스럽지 않다는 의미는 되지 못한다.


유일무이하게 특별한 것만이 트라우마적 사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구조주의적 트라우마 이론가로 불리는 학자들은 트라우마가 사건의 특별함이 아니라,


① 충격적인 어떤 사건과 그 사건을 경험하는 사람의 능력 사이의 간극

② 그것을 말하고 해석할 수 있는 틀의 부재

③ 그것을 껴안아주고 이해해줄 수 있는 주변 사람들의 지지나 공감의 부족


등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로드의 질병 경험이 트라우마가 된 것은 바로 이런 요인들 때문이었다.


로드는 유방암 진단과 함께 절제술을 받은 경험을 바탕으로 『암 일기(The Cancer Journals)』를 펴냈다.

『암 일기』를 살펴보면 로드는 처음에 수술로 인한 물리적인 고통을 기록하지만 그 통증은 시간이 지나자 누그러졌을 뿐, 그녀를 진짜 괴롭힌 상처는 다른 데서 왔다고 말한다.


그것은 유방암 회복 단체에서 파견된 자원봉사자와 그녀가 수술받은 병원의 간호사와의 만남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드가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에 있을 때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찾아왔다.

자원봉사자는 양털로 채워진 가슴 보정 패드를 잔뜩 가져와서는 착용해보라고 강권하였다.

자기도 절제술을 받고 보정 패드를 착용했는데 예전처럼 양쪽 가슴이 다 있는 것처럼 보이니 고민해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로드는 보정 패드를 착용해보고 거울을 통해 균형 잡힌 양쪽 가슴의 형태를 확인하지만, 이내 그 패드를 빼버리고 만다.

오른쪽 가슴이 절제되어 당장 몸의 풍경이 급격하게 변형된 것이 이상하게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녀의 삶의 중요한 의미로 자리했던 한쪽 가슴이 떨어져나갔다는 사실이 실감조차 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아직 그 상실을 애도할 시간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그 상처를 보이지 않게 가리라고 하니 도대체 그 이상한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러웠다는 것이다.


그 일로 인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충격이 찾아온다.

수술 후 퇴원했던 로드는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찾았다.

수술 후 첫 외출이라 신경 써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 씻고 꾸며서 병원에 당도했는데, 정작 간호사는 로드의 기대와 전혀 다른 말을 내뱉었다.

“오늘 보정 패드를 하고 오지 않았네요? 적어도 진료실에 들어올 때는 무엇이라도 하고 오는 것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도의에 어긋나지요.”

당시의 순간을 로드는 “허를 찔린 듯 충격적이었다”라고 일기에 쓰고 있다.


여기서 자원봉사자와 간호사의 시각은 그들의 개인적 관점이라기보다는 가슴 절제술을 받은 여성을 바라보는 사회적인 시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질병의 고통이나 한쪽 유방을 상실한 흔적을 다른 사람이 보지 않게 얼른 봉합하라는 것이다.

아직 물리적인 고통조차 가시지 않아서 순간순간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데, 거기다 상실의 현실까지 빨리 잊으라고 강요하다니─로드에게 그들의 세계는 멀게만 느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두 현실 사이의 간극은 극복할 수없는 것처럼 느껴져서
로드는 제대로 말도 못하고 넘어갔다.


시간이 흘러 물리적인 통증이 사라져가고 있을 때에도 그 충격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그녀의 삶을 더 괴롭게 했다.

그리하여 수술 뒤 회복기에 접어들었을 즈음에 로드는 암 진단에서부터 수술, 그리고 치료를 받을 때 겪은 일들을 생생하게 기록한 일기를 다시 꺼내 읽고, 그것을 재구성해서 만든 에세이가 바로 『암 일기』이다.


물리적 통증과 심적 고통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적은 일기가 아니다.


고통 경험의 현실을 그대로 기록한 과거의 일기가 포함되어 있지만, 그때의 일기를 있는 그대로 옮겨 쓰지 않은 것이다.

과거의 일기는 필기체로 표기하여 후에 작성한 에세이 내용과 구별이 되게 하고, 지금 말하고자 하는 내용에 필요한 대목만 선별하여 인용하는 식이었다.

그럼으로써 생고통의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아 그녀 자신이 보기에도 혼란스러웠던 일기의 내용은 누구나 쉬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가령, 수술 실밥을 제거하기 위해서 병원에 갔던 날 로드는 간호사에게 어떠한 대꾸도 하지 못한 것으로 일기에 썼지만, 『암 일기』에서는 이야기가 다르게 전개되는 식이다.

게다가 당시 미처 표출하지 못했던 치욕과 분노를 드러내며 통쾌한 복수의 말도 덧붙여놓는다.


이스라엘 총리, 모쉐 다이안(Moishe Dayan)이 텅 빈 그의 안와에 안대를 하고 의회나 TV에 나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에게 의안을 하고 나오라든지 도의에 맞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은 그를 명예로운 상처를 가진 용사로 본다. (……) 만약 당신이 다이안의 텅 빈 안와를 보는 데 문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은 당신의 문제지 그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소심한 복수같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우 치밀한 계획하에 이루어진 사후 대처가 엿보이는 대목도 눈여겨볼 만하다.

『암 일기』에는 간호사가 잠깐 등장한 것을 제외하고는 왜 그 어떤 의료인들도 일기에 등장하지 않으며 심지어 의사도 익명의 엑스트라처럼 스쳐 지나갈 뿐 유의미한 만남조차 성사되지 않는다.

로드는 의사나 간호사의 일방적인 의료 담론은 침묵시키고 암 환자, 생존자, 그리고 작가로서 로드의 입장에서 자신의 아픈 경험을 부각시킨 것이다.

수술의 상처에 비명을 질러도 진통제 주사로 그녀의 아픔을 억눌렀던 의료 권력에 대해서, 그리고 한쪽 가슴의 상실의 현실 자체마저 없었던 일로 하자는 전문가들의 태도를 글쓰기로 되받아친 것이다.


만약 로드가 과거 일기에 적힌 내용을 액면 그대로 읽고 보여줌으로써 그때의 고통 경험에 몸서리치고 분노하는 선에서 그쳤다면, 아마 일시적으로는 속이 후련하고 기분이 나아지는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게다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 고통을 전염시켰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의 사연을 훗날 로드의 관점에서 다시 서술함으로써, 한쪽 유방을 잃은 고통과 상처는 보정물로 치유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도려내진 한쪽 가슴 때문에 일그러진 신체 풍경에 익숙해질 때까지 떨어져 나간 부분을 어루만지고 위로하겠다는 본인의 의지가 확연히 전달된다.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신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상처를 자신의 자화상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낸 그림들을 그렸다.


트라우마적 기억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작정 기억으로부터 도망쳐서도 안 되고, 그 기억을 한 방에 떨쳐버릴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브라이슨과 로드는 공통적으로 그간 외면하고 망각했던 원사건과 대면해서 그 일이 도대체 왜, 어떻게 일어났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제안한다.

그러기 위해선 비무장 상태로 급습당하듯 대재앙적 사건을 맞이했던 첫 경험 때와 달리 이번에는 어느 정도의 무장을 하고 맞서야 한다고 첨언한다.

그래야만, 도래하는 사건에 압도당하지 않을 테니까.


브라이슨과 로드는 펜이라는 무기를 가지고 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고 입을 틀어막았던 과거의 괴물과 맞서 싸웠다.

펜을 들고 있는 그들에게, 과거의 위력은 위협적이었지만 결국엔 패배하고 말았다.

물론, 과거 괴물의 가공할 만한 힘이 단 한 번의 글쓰기에 제압되었다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런 엄청난 힘에 대항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방어력을 갖추게 되었으니 예전처럼 두 눈 질끈 감고 과거

의 소용돌이가 일으키는 혼돈이 지나가기를 숨죽이며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오히려 눈을 크게 뜨고, 현 위치에서 소용돌이 치는 과거의 지점을 파악함으로써 앞으로의 경로를 예측하고 사전에 피해를 막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발자크의 「아듀」에 등장하는 정신적 외상 피해자 스테파니에서부터 현실 세계의 실제 생존자인 로드에 이르기까지 트라우마에 관한 앞의 많은 이야기들에서 우리는 기억의 중요성과 망각의 필요성을 함께 알 수 있다.

외상을 입은 피해자에게 망각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조건(혹은 선택)인 동시에 기억은 정상적인 망각을 위한 필수적 조건이 된다는 것,


말하자면 기억이 생존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만큼
망각 역시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8권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에 수록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_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이전 07화 사랑은 불안을 수반한다─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역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