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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억에 관한 마이크로인문학
By 몸문화연구소 I 임지연 서길완 . Aug 10. 2017

잊어야 살 수 있는 기억이 있다

과거의 경험, 꼭 그대로 ‘리콜’돼야 할까?─오노레 드 발자크, 『아듀』

망각이 우리의 연속적인 삶과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면, 기억을 보수하는 일은 곧 자아와 삶을 복원하고 치료하는 일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저런 요인들로 뇌에서 술렁술렁 빠져나간 과거의 정보를 되찾는 일 역시 그 사람들의 삶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억을 담당하는 뇌 신경 손상으로 기억장애를 갖게 된 사람들에게도 더 이상 기억을 새어나가지 않게 하고 그 기억을 복구하는 일은 그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일일 것이다.


헐리우드 기억상실의 대표 주자 제이슨 본. 지중해 한가운데서 총상을 당한 채 발견되는데, 자신에 대해서 모든 것을 잊어버린 상태다. 그치만 전투본능 덕분에 생존은 너무나도 당연..



그렇지만 사라진 기억이 반드시 온전히 복구되어야 한다는 믿음이
기억장애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도 많다. 



루이 캉디드 불랑제, 「오노레 드 발자크의 초상화 초벌화」(1863). 19세기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는 사실주의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발자크의 소설 『아듀』는 기억의 누수를 막고 구멍 난 부분을 복원하는 일이 언제나 개인의 정체와 삶의 안녕을 도모하는 일에 도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제기하고 있다. 


필립 드 슈시 대령은 친구와 사냥을 하러 나선 길에서 광기 어린 한 여인과 우연히 마주친다.

그 여인은 ‘아듀’(안녕)이라는 단 한마디밖에 하지 못한다.

그 여성은 알고 보니 과거에 필립의 연인이었던 스테파니 드 방티에르 백작 부인.

스테파니는 나폴레옹 군대에 종군하게 된 필립의 군대를 따라서 러시아까지 가는데, 프랑스군이 퇴각을 거듭하면서 일행은 러시아 군에 포위당하게 된다.

배를 타고 베레지나 강을 건너려고 했지만, 나룻배에는 두 사람이 올라 탈 여유밖에 없어서 필립은 스테파니와 그녀의 남편을 태워 보내고 자신은 강가에 남는다.


나룻배에 오른 스테파니가 필립을 향해 외친 마지막 한마디가 바로 ‘아듀’였다. 


그렇지만 스테파니의 남편 방티에르 백작이 나룻배에서 강으로 떨어져서 목숨을 잃고, 떠내려오는 얼음덩어리의 날카로운 부분에 목이 잘려 죽는 모습을 스테파니는 고스란히 지켜보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스테파니도 적군에게 붙잡혀 2년 동안 적군 부대의 위안부가 되어 끌려다니면서 성적 유린을 당한다.

몇 년 뒤 스테파니가 큰아버지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발가벗겨진 채 제정신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였다.

 

필립은 우아하고 아름다운 귀부인이었던 스테파니가 지금은 반짐승처럼 되어 과거의 연인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알아보지 못하는 데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의 기억을 되돌리기 위해 필립은 그녀의 치료에 온힘을 써보지만 모두 허사였다.

그가 마지막으로 택한 방법은 겨울 러시아 평원의 베레지나강을 모방한 장대한 무대를 만들어 두 사람이 이별하는 장면을 그대로 재연하는 일이었다.


얀비에르 수흐돌스키, 「베레지나강을 건너는 나폴레옹」(1812). 모스크바에서 회군하던 나폴레옹 군대가 베레지나강에서 러시아군에게 패전하며, 나폴레옹 제국은 내리막을 치닫게 된다.


닳아서 헤진 군복을 입은 농민들이 외치는 고함소리는 바로 뒤쫒아오는 러시아 병사의 외침 그것이었다.

그 정경 속에 몸을 맡기고 강에 떠오른 나룻배를 본 스테파니는 기억을 되찾는다.

그리고 연인 필립의 모습을 똑똑히 확인하자마자 ‘사랑의 인사’를 남기고 곧바로 심장이 멎고 만다.  



인간다움은 그렇게 전류처럼 되살아났고, 영혼을 빼앗겼던 몸에 생명이 불어넣어졌다.
"스테파니!" 
"오! 필립이군요!"
필립은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그녀는 필립의 품에 깊이 안겼다. 스테파니가 눈물을 터뜨렸다. 그러나 곧 눈물이 그쳤다. 그리고 번개라도 맞은 듯 몸이 굳어지며 가냘픈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필립. 당신을 사랑해요, 필립!"



통상적으로 누락된 기억을 회복하는 일은 구멍 난 정체성을 바로잡아 삶을 지속할 수 있게 하는 계기를 마련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스테파니에게 과거 경험의 귀환은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다른 역할을 했던 것일까?


왜 스테파니는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죽음을 맞이했던 걸까? 



필립의 입장에서 보자면 스테파니의 기억을 되살리는 일은 과거의 연인이었던 그를 알아보게 하고, 그 자신이 사랑했던 우아한 귀부인의 이미지를 복원해 그녀와의 관계를 회복하려는 것이다.

엄격하게 생각해보면 이 모든 노력은 필립 자기 자신을 위한 욕망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럼에도 필립의 노력은 헌신적인 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녀에게 과거의 우아한 귀부인의 이미지와 정상적인 삶을 돌려준 것이 무엇이 잘못되었단 말인가?


스테파니의 입장에서 기억과의 투쟁을 살펴보아야 해답을 얻을 있다.



그런데 『아듀』는 제삼자의 입장에서 스테파니가 기억을 찾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어 그녀의 속내가 어떠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더구다나 제정신도 잃은 스테파니 아니던가.

필립에게 마지막 사랑의 인사만 남기고 삶의 무대에서 퇴장한 스테파니에게 현실 세계로의 복귀가 왜 세상을 저버릴 만큼 불행한 일이 되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는 스테파니의 과거를
스테파니에게 갑자기 ‘도래한 사건’의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제삼자인 필립이 기억하는 과거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도래한 사건’이 무엇일까?

‘도래한 사건’이란 필요에 따라 자기 의지대로 과거 사건을 소환하는 그런 일반적인 기억이 아니다.

사건의 체험 당사자도 모르는 사이에 과거의 사건이 귀환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지불식간에 치밀고 들어오는 기억이 좋은 것이 아니라 너무도 끔찍해서 피하고 싶은 것이라면?


스테파니에게 갑자기 ‘도래한 사건’이란 바로 그런 종류의 과거 경험인 것이다.

잔인하리만치 끔찍한 남편의 사고를 자기 눈으로 목격했고, 2년 여간 적군의 위안부로 성적 유린을 당했던 당시의 경험들은 그녀에게 차라리 존재하지 않는 것보다 못한 것이지 않겠는가.

그만큼 그와 관련된 기억은 철저히 망각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테파니의 망각은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고안된 방어막이었다.


마음과 육체가 당한 폭력에 대해 무뎌짐으로써 그녀는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이 필립이 행한  ‘재연’ 작업 때문에 귀환해버린 것이다. 

인식되지 않아야만 생존할 수 있는 상황에서 사건이 귀환한다는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것은 그 사건을 맞이해야 하는 사람에게 뜻밖의 재난이 될 수 있음을 뜻하는 것이다.  


에두아르 투두즈가 그린 1897년 미국판 표지 일러스트.


스테파니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우아한 귀부인으로서의 과거 정체성을 회복함과 동시에 그녀가 도저히 함께 가지고 살아낼 수 없는 위안부의 과거를 불러들였다.

그 악몽을 마주한 귀부인 스테파니는 온몸이 얼고 정신이 마비되어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아름다운 귀부인의 이미지를 찾아서 과거의 연인이었던 그를 알아봐주기를 바랐던 필립의 간절한 소망이 오히려 스테파니를 파국으로 내몬 셈이다.



※참고도서: 오카 마리, 『기억 서사』, 김병구 옮김, 소명출판, 2004.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8권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서길완 著, 8월 23일 출간 예정)에 수록될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8월 출간 예정)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8월 출간 예정)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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