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나이 들었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영화 「죽어도 좋아」, 「45년 후」

한동안 사랑의 전담자들은 젊은 청춘 남녀의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는 어린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특히 박범신의 『은교』는 노년기의 사랑이 청춘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미학적으로 증명했다.

소설가 박완서는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일갈했다.


누구나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은 평등하다.
사랑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홉 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실존 인물들이 실제 자신들의 사연을 바탕으로 연기한 영화 「죽어도 좋아」(2002)의 영문 제목은 'Too Young to Die'이다.


영화 「죽어도 좋아」는 노년의 사랑이 품위나 점잖음이 아니라, 쾌락과 섹슈얼리티를 중심으로 하고 있음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영화에서 두 노년 커플이 성행위를 하면서 “에, 나 죽겄네, 너무하네, 너무하네”라는 오르가슴을 표현하는 에로틱한 대사는 노년의 사랑이 가닿을 수 있는 최대치이다.


일반적으로 노년의 성 담론은 건강 증진과 관련된다.

성행위를 많이 하면 전립선 염증이 예방되며, 노화·치매·건망증 예방에 효과적이고, 골다공증 치료에 좋다고 의학계와 복지계는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러나 노년의 사랑은 감정 교환, 인정과 배려, 그리고 성적인 욕망이 복합적으로 구조화된 것이다.


노년 커플의 문제는 건강이나 감정 표현 욕구가 아니라, ‘사랑’ 그 자체다.


보통 노년의 섹슈얼리티는 ‘징그럽다’, ‘민망하다’, ‘거북하다’ 등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성관계나 섹슈얼리티를 젊은이들의 것으로 독점하려는 사회적 불평등의 표현이다.

그것은 노인들로부터 성, 젠더, 욕망, 육체성과 같은 인간의 기본적 조건들을 차단하는 행위이며,

노인을 인간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폭력적 관점이다.


노인은 무성적 존재가 아니다.

「죽어도 좋아」는 최초 개봉 당시 7분이 넘는 시간 동안 적나라하게 묘사된 노인들의 성행위 장면이 사회 정서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제한 상영가 판정을 받았었다.


최근 연구는 노년 배우자 간의 사랑과 책임감의 정도가 축소될 것이라는 통념과는 달리,

다른 연령층 커플과 특징적인 차이가 없다고 보고하고 있다.

노화 중 가장 늦게까지 남는 것이 ‘성욕’이며, 노인 인구의 68퍼센트가 성생활을 한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노인에게 사랑을 절대적으로 ‘허(許)’해야 한다. 



영화 「45년 후」는 노년 커플의 질투, 기억, 섹슈얼리티, 솔직함, 신뢰, 그리고 열정적 사랑과 지속적 사랑의 문제를 제기한다.

기존에 오래된 커플들의 사랑을 건강 증진이나 가족제도 안에서 편협하게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노년 커플의 관계 그 자체에 집중한다.


첫사랑의 소식에 옛 기억에 한껏 빠져든 남편 제프를 보는 케이트는 불안감을 느끼지만, 제프는 첫사랑에 예민해하는 케이트가 이해되지 않는다.


45주년 결혼기념 파티를 앞두고 있는 부부 케이트와 제프에게 어느 날 한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50여 년 전 알프스 암벽 틈에 빠진 여성의 시신을 찾았다는 내용이다.

제프의 첫사랑 카티야였다.

남편 제프는 들뜬 표정으로 “나의 카티야를 찾았대”라고 말하며, 그녀의 사진을 찾아내 다락방에서 밤을 새우기조차 한다.

심지어는 오랜 지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시신을 만나기 위해 알프스행을 기획하기조차 한다.

아내 케이트는 죽은 그녀에게 빠져버린 남편에 대한 질투의 감정을 냉각하며 45주년 결혼 기념 파티를 준비한다.

결국 그녀는 “괜찮다고 했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라고 불편한 자기감정을 토로하고 만다.

파티는 무사히 진행되지만, 케이트가 잡았던 남편의 손을 차갑게 뿌리치는 것으로 영화는 끝난다. 



첫사랑에 대한 남편의 기억을 아내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 기억이 결혼 이전 남편만의 사건이었다면, 아내는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


이 영화는 결혼제도 안에서 사랑을 지속할 수 있을까, 가능하다면 어떻게 지속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의 균열은 남편이 첫사랑을 추억해서도, 그 추억을 아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않아서 생긴 것도 아니다.

이들이 사랑의 개념을 달리 이해했기 때문이다.

아내는 사랑을 완벽한 융합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은 사랑을 자율적 관계 맺음이라고 여겼다.

이 노년 커플은 아마 이 사건 이전에도 불화했을 것이고, 불화의 원인도 아마 같았을 것이다.


노년이 되었다고 해서 사랑의 문제 역시 변하지 않는다.


노년의 섹슈얼리티는 건강 증진이라는 일차원적 목적이 아니라, 관계의 즐거움이라는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또한 노년의 사랑은 외로움을 달래줄 말동무가 필요하다는 실용적 목적 때문이 아니라, 둘의 무대에서 함께 노닐어야 할 사랑의 권리로 이해해야 한다. 


ⓒJohn(tokaris @flickr)


이제 현대 사회는 바야흐로 신 연애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위험과 재난이 일상화되면서 사랑은 종교적인 위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어린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사랑의 권리를 평등하게 배분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후로도 사랑은 더욱 중요한 사회적 문제로 쟁점화될 것이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9권 『사랑, 삶의 재발명』(임지연 著)에 수록될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이전 04화 잊어야 살 수 있는 기억이 있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