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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함에 감추어진 섹슈얼리티 - 유년의 첫사랑

황순원, 「소나기」 / 위기철, 「아홉 살 인생」


황순원의 소설 「소나기」가 여전히 한국문학사에서 고전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은 첫사랑에 대한 환상 때문이다. 


첫사랑은 모든 인간이 겪는 통과제의 같은 것이며,
불완전성에 대한 채울 수 없는 욕망을 남긴다. 


덜 익은 살구를 먹었던 기억처럼 말이다. 

맨 처음 살구 한 입 베어 물었던 기억은 혀 안 가득 고이는 침으로 분명하게 남아 있다.

첫사랑의 기억을 입 안 가득 침으로 고이게 만드는 물리적 작용이 「소나기」를 한국문학사의 고전으로 만들었다. 

갈밭 사이로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뛰어가는 소녀의 하얀 목덜미, 왜 바보라고 말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아찔하게 자극적인 말들, 소년의 호주머니 안쪽 어둠 속에서 손바닥의 온기로 따뜻하게 데워졌을 돌멩이, 소나기 내리는 수숫단 안쪽에서 훅 끼쳤을 몸 냄새, 소년의 등에 업혀서 느꼈을 최초의 성적 감각, 무덤에 영원히 봉인된 첫사랑의 기억들. 


시대를 풍미한 로맨스 영화 「클래식」(2003)은 최초에 「소나기」의 소녀가 죽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라는 가정에서 구상되었다고 전해진다.


1950년대 초반 아직 한국전쟁이 끝나지 않았던 때에 발표된 이 소설은 60여 년이 지나도록 국어 교과서에 수록되어 국민적 서사로 각인되어왔다.

첫사랑의 문법으로 말이다. 

소년 소녀 시절의 순수함, 감추어진 섹슈얼리티, 영원한 사랑의 기억, 죽음으로 봉인된 불가능한 순수한 사랑은 한국인에게 코드화되어 국민적 감수성이 되었다.


국민 첫사랑 수지 이전에 윤 초시네 손녀딸이 먼저 있었던 것이다. 


첫사랑은 윤 초시네 손녀딸처럼 잔망스럽지만 순수해야 하고, 주인공 소년처럼 부끄러워하면서도 행동적이어야 한다. 

최근 현실 속의 소년소녀들이 이처럼 순수한 사랑을 하지 않자 대개의 어른들은 이들의 사랑을 잘못되었다고 비난한다.

어른들의 첫사랑에 대한 환상이 사회적으로 사랑의 기준점으로 제시되고, 그 기준점에 도달하지 못하는 연애는 비난받는다.


환상의 힘은 무섭도록 강력하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우리의 사랑은 소년 소녀 시절에 시작된다는 것이다. 「소나기」의 인물들처럼 말이다. 


최근 사랑의 주인공들의 나이는 더 어려지고 있다.

위기철의 소설 『아홉살 인생』을 보라. 


2004년에 영화로 만들어진 「아홉 살 인생」. 서울에서 전학 온 우림과 짝이 된 여민은 자신을 야만인 취급하는 그녀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이 들기 시작한다.


인생은 아홉 살부터 시작된다고 믿는 소년 백여민은 서울에서 전학 온 도도하고 새침한 소녀 장우림에게 편지를 보낸다. 


“내는 니가 조금씩 좋아진다. 내 이름은 절대로 안 밝히겠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너를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언젠가는 내 이름을 꼭 밝힐 날이 올 끼다. 그때 낸 줄 알아라. 아쉽게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남자.” 


장우림이 담임에게 이 편지를 제출하자 담임선생님은 여민에게 편지를 낭독하게 한다. 

그때 남몰래 배신의 눈물을 머금는 소녀가 있었으니, 언제나 여민 편을 들어주던 오금복. 

사랑의 삼각관계는 아홉 살 인생을 더 복잡하게 만든다.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경상도 산동네 삼총사 여민과 기종, 금복 사이에 전학생 우림이 들어오면서 이들의 관계는 폭풍 속에 휘말려버린다.


인생의 깊은 의미를 길어 올리려면 사랑의 감정, 질투, 용기, 배려, 놀림, 이별의 물살을 헤쳐 가야 한다. 아홉 살 인생 여민은 그렇게 인생을 알아간다.


한동안 사랑의 전담자들은 젊은 청춘 남녀의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사랑의 주체는 어린 아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폭넓다. 

박범신의 『은교』는 노년기의 사랑이 청춘의 그것과 구조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미학적으로 증명하였다.

박완서는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일갈하였다.

누구나 사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랑은 평등하다.


사랑은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니다. 


아홉 살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사랑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이 되었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9권 『사랑, 삶의 재발명』(임지연 著)에 수록될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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