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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기억에 관한 마이크로인문학
by 몸문화연구소 I 임지연 서길완 Jul 27. 2017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연결해주는, 기억

영화 「Overboard」, 「첫키스만 50번째」, 「메멘토」

우리는 평소 기억의 중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공기가 부족할 때 새삼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듯, 우리는 기억에 장애가 발생했을 때 그 중요함을 깨닫게 된다. 


기억은 단순하고 일상적인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것에서부터 자기를 인식하고 세계와 관계를 맺게 하는 것까지

나와 나의 삶, 그리고 세계를 직조하고 구성하는 데 있어 중추 역할을 한다.

기억은 삶의 연속성을 유지해준다.
매 순간이 과거로 구성되는, 현재에 의미를 부여한다.


현재의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시키는 수단으로 기억은 핵심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기억이 없었다면, 우리에게 있는 것은 텅 빈 공백이거나 다른 누군가가 남긴 자국일 것이다.

따라서 “하나의 종(species)으로서 우리를 만드는 것이 있다면, 일관된 진정성을 느끼게 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영화 「환상의 커플」(1987)을 보자.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접하는 전형적인 기억상실 시나리오다.

영화의 여주인공은 요트에서 떨어져 머리를 부딪혀서 기억을 잃은 뒤 극적인 인격 변화를 겪는다.

사고 이전의 그녀는 부유하고 철없는 사교계의 명사였다면, 기억을 잃은 뒤에 백지상태에서 새로이 겪는 경험들을 통해 마음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성격이 된다.


「Overboard」는 드라마「환상의 커플」로 리메이크되었다. 「환상의 커플」에서 한예슬이 연기한 주인공 조안나의 이름은 「Overboard」의 주인공의 이름에서 따왔다.


기억 상실을 모티브로 하는 시나리오는
수십 편의 다른 영화에도 나타난다.


영화, ‘본’ 시리즈의 주인공 제이슨 본 역시 자기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서 자신의 과거의 행적을 추적하는 인물로 유명하다.  


기억 장애로 인해 정체성의 상실과 인격의 변화를 겪었던 경우와 달리, 기억을 잃은 후에도 자기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거나 사고 이전의 기억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로맨틱 코미디 「첫 키스만 50번째」(2004)를 보자.



진실한 사랑은 자신의 인생에 방해만 된다고 굳게 믿고 있던 소문난 바람둥이 헨리는 우연히 만난 루시에게 첫눈에 반하며 삶에 극적인 변화를 맞는다.

헨리는 노련한 작업 솜씨를 발휘해서 그녀와의 첫 데이트 약속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지만 데이트 당일, 그녀를 만나 반갑게 인사를 건넨 헨리는 오히려 파렴치한으로 몰린다.

루시는 어제 일은커녕 그를 기억조차 못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루시는 1년 전 교통사고 이후 사고 당일에 기억이 멈춰버린 단기 기억상실증 환자였던 것이다.


헨리의 뛰어난 연애기술로 둘은 다시 사랑에 빠지게 되지만, 문제는 루시의 사랑 유통기한이 딱 하루뿐이라는 점이다.

헨리는 매일이 새로운 그녀와의 데이트를 위해 갖가지 기상천외한 기억 연상술을 발휘한 끝에 결국 결혼에 골인한다. 

이제부터 헨리는 평생 동안, 매일 그의 존재를 확인시켜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게 되었다.

이를 위해 헨리가 고안해낸 방법은 매일 아침마다 그가 먼저 일어나서 루시의 머리맡에 둘의 만남에서부터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비디오테이프를 놓아두는 일이었다.

만약 그 테이프가 없다면, 루시와 헨리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다름없다.

헨리의 존재는 물론 헨리를 사랑했던 연인도, 그를 사랑하는 부인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유명한 기억상실증 환자의 사례를 참조로 해서 만든 영화 「메멘토」(2000)도 이와 유사하다.

레너드는 그의 부인이 집에 침입한 강도에게 성폭행을 당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그 충격으로 새로운 기억을 형성할 수 없는 단기 기억상실증을 앓게 된다.

사고 이전의 기억은 갖고 있지만, 사건 이후 기억을 형성하는 능력을 잃게 된 것이다.

20분 정도의 시간이 경과하면 그동안 경험한 세계는 물거품처럼 사라지기 때문에 레너드의 하루 시간 대부분은 정보 조각들을 종이 위에 미친 듯이 휘갈겨 쓰는 데 소비된다.

만약 그가 입수한 정보가 사실이라는 확신이 들면, 그것은 영구적인 기억(정보)로 그의 몸에 문신으로 새겨진다.



이런 상황이라면 앞으로 갱신될 수많은 그의 정체성들과 미래는 종잇조각들 위에 휘갈겨 쓴 정보의 파편들과 그의 몸에 새겨진 문신들에 의존해서 형성되고 상상될 수 있을 뿐이다.

문신에 새겨지고 종이에 기록되지 않는 경험들과 사람들, 그리고 심지어 그 자신까지도 그에게는 불확실하고 위험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다.

설령 그의 몸과 종이에 기록된 것이라 할지라도 20여 분마다 새롭게 재편되는 그의 세계에서 안전하고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겠는가.


요컨대 앞의 예들을 통해 볼 때,

장기적이든 단기적이든 간에 기억에 누수가 생기면 그 사람의 삶은 순식간에 단절되고 정체에 구멍이 나서 삶을 지속하기 힘들게 된다.


기억의 상실(망각)과 증발, 혹은 기억의 누수가 우리의 연속적인 삶과 정체성에 이토록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면,

기억의 누수를 막고 기억의 구멍 난 부분을 메우는 일은 곧 기억으로 조각난 자아와 삶을 복원하고 치료하는 일과 직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8권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서길완 著, 8월 23일 출간 예정)에 수록될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8월 출간 예정)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8월 출간 예정)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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