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영화 「뷰티 인사이드」
사랑의 관계에서 어려움 중 하나는 차이에 대한 갈등이다.
사랑하는 상대와 생각이나 취향, 가치관이 다를 때 커플들은 티격태격 싸움을 하다가 급기야 결별에 이르고야 만다.
차이가 갈등으로 치닫는 이유는 사랑을 융합, 하나 됨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커플이 사랑에 빠지는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대체로 상대를 동일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데서 시작한다.
우연히 공교롭게도 상대는 내가 좋아하는 가수를 좋아하고, 내가 즐겨 마시는 종류의 커피를 좋아하며, 내가 여행지로 삼았던 그곳을 가본 적이 있고, 같은 책을 읽고 공감하며, 같은 대선 후보를 지지하고, 직업과 가족에 대한 가치관이 같다는 이유로 매력을 느낀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게 되면 둘은 하나가 되려는 욕망을 실현하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일심동체’로 불렸던 융합, 하나 됨의 욕망이다. 서로 같아지면 같아질수록 사랑은 성공적이라고 평가받는다.
그러나 서로 다른 인간이 사랑한다고 해서 궁극적으로 같아질 수는 없다.
사랑이 타인에 대한 존재론적인 친밀함이라면, 동일한 존재끼리는 사랑할 수 없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랑을 융합, 하나 됨으로 이해할수록 차이는 불편한 것이 되고, 갈등이 된다.
가령, 커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면 ‘너와 나는 다르다’라는 판단과 ‘상대를 잘못 골랐다’라는 결론에 이르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문제는 상대가 아니라, 차이에 대한 인식 때문인데도 말이다.
사랑은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이다.
연인들은 근원적으로 타자적 존재이며, 사랑의 관계는 동일자가 아니라 타자 간의 연대를 말한다.
그런데도 커플들은 상대를 개성과 차이보다는 하나 됨, 동일성, 융합의 관점에서 바라본다.
융합으로서의 사랑은 현실에서의 사랑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다.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은 사랑이 어떻게 연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고 서로를 파괴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사랑하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하고, 히스클리프는 그녀를 떠났다가 돌아와 끔찍한 사랑의 복수를 한다.
캐서린은 사랑의 고통 때문에 시름시름 앓다 죽고, 히스클리프 역시 죽은 캐서린의 환영을 보면서 죽는다.
이들의 사랑이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융합이라는 사랑의 방식 때문이다.
캐서린은 히스클리프를 “그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며 “그와 내 영혼은 같은 것”으로 여겼다.
히스클리프 또한 캐서린을 향한 사랑을 “땅 밑에 있는 영원한 바위”로 인식했다.
그가 나보다 더 나 자신이며, 영원한 바위처럼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들의 강한 연대감은 역설적으로 이들의 사랑을 파괴하였다.
이들이 서로 배반하고 복수했기 때문이 아니라, ‘융합적 사랑’과 ‘영원한 사랑’의 가치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삶 속에서 형성되는 자기 정체성과 관계의 변화를 무시했다.
그리고 사랑의 에너지를 복수와 죽음, 자기 파멸로 소진했다.
‘자기’란 누구일까?
사랑의 힘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사랑에 빠진 주체들은 자기가 얼마나 속수무책 바보가 되는지 절감한다.
사랑의 열정은 합리적 판단을 흐리게 할 수도 있지만, 타자에게 기꺼이 열려가며, 둘이라는 복수(複數)적 관계에 의해 자기 정체성을 구축하게 한다.
사랑의 주체들은 자기의 경계를 허물고 침입하는(사랑하는) 타인을 즐거우면서도 고통스럽게 환대해야 하는 역설적 존재이다.
나라는 주체는 나의 외부인 타자, 나 아닌 모든 것들과 연관되어 있으며, 타자들과 연루되면서 새롭게 형성되는 내가 바로 ‘타자로서의 자기 자신’이다.
나와 타자는 자기 안에서 상호 인정되기 때문에 절대적 외부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관계적 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의 이야기는 수많은 타자들의 이야기와 혼합되면서 새로이 해석된다.
또한 어떤 시점과 상태와 상황에서 이야기하느냐에 따라서도 달라질 수 있다.
주체란 이처럼 가변적이고, 복합적이며, 불연속적이고, 불안정한 존재다.
그렇다면 타자란 누구인가?
개인적인 경험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같은 기억도 다르게 하며, 일관된 행동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고,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오리무중일 때가 많다.
오랫동안 삶을 함께 나누었으면서도 결국 나는 그를 잘 모르겠다는 결론을 내릴 때, 사랑은 길을 잃는다.
내가 사랑하는 그는 이전의 그와 늘 다르며, 나와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 때로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경험한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사랑의 문제를 타자의 문제로 돌리기 시작한다.
나와 맞지 않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나와 잘 맞는 사람은 누구일까?
나와 잘 맞는 사람이란 나와 동일성의 비율이 높은 사람을 말하는 걸까? 동일성의 비율을 추출하는 것이 가능할까? 동일하지 않은 부분은 어떻게 해야 하나?
나와 같은 대통령 후보를 찍고, 같은 음식을 좋아하고, 같은 소설책을 읽고, 같은 음악을 듣는다고 해도, 그 이외의 모든 것들은 나와 다르다.
같은 것의 목록이 많다고 하더라도 다른 것의 목록의 수를 넘지 않는다.
근본적 차이를 어쩌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시 우리는 차이를 두려워하는 걸까?
차이를 갈등과 불화의 전제라고 여기는 것은 아닐까?
사랑이 타인과의 친밀감, 연대, 열정적 관계 맺음이라면, 그것은 근본적으로 차이에 대한 경험이다.
사랑이란 자기와의 사랑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나와는 다른 타인과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이는 사랑의 전제 조건이 된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자를 외부성에서 찾는다.
타자란 나의 외부에 있는, 본질적으로 나와 다른 사람이다.
어떤 특정한 것이 달라서가 아니라, 오직 다름 그 자체 때문에 타자가 된다.
사랑이 하나 됨이 아니라 ‘둘 됨’ 이라는 복수성을 실현하는 것은 타자의 타자성(다름) 때문이다.
사랑이 자기와의 관계가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라면, 사랑은 타자의 타자성에 기초한다.
내가 사랑하는 상대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사람이고, 내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는 사람이며, 자기동일성의 감옥에서 벗어나 나를 새롭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상대를 사랑하지만, 상대를 끝까지 이해하지 못하고 소통할 수 없는 지점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어떻게 나의 외부에 있는 자, 나와 전적으로 다른 자,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인 상대를 완전하게 알 수 있겠는가?
사랑은 나와 다른 타자를 사랑하되, 사랑은 상대를 장악하거나 소유할 수 없는 미지의 지점을 남겨둔다.
그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 할 일이다.
사랑하는 연인을 옆에 두고도 사랑을 이루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일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사랑을 집착으로 오해하는 연인들, 사랑을 자기 결핍을 채우기 위한 보충물로 여기는 연인들, 사랑을 또 다른 자기와의 만남으로 인식하는 연인들은 ‘내가 사랑하는 그는 누구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자고 일어나면 몸이 바뀌는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영화이다.
주인공 우진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그는 대머리 중년 남자이기도 했다가, 다른 날에는 머리가 긴 여자였다가, 조폭의 외모를 가지기도 하고, 어린아이였다가 외국인으로 바뀌어 있다.
우진은 가구점에서 일하는 이수를 사랑하게 된다.
우진은 늘 변하는 존재이므로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이수는 우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하는 존재란 우진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영화는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영화는 사실상 이수에 대한 영화다.
이수는 어느 날 우진을 만나 데이트를 하지만, 다음 날 우진을 알아볼 수조차 없다.
우진의 외모가 바뀌어 있기 때문이다.
이수는 변하는 몸을 가진 존재,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존재인 우진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진과 같은 존재를 사랑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연인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를 사랑하는 일은 가능한가, 불가능한가?
외부에 존재하는 타자와 소통하고 에로스를 나누는 일은 어려운 일일 것이다.
어렵다는 것이지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사랑이 왜 어려운가라는 질문은, 이는 ‘타자’와의 사랑이 가능한가라는 물음과 연관되어 있다.
사랑의 타자성에 관해 레비나스는 연인들의 애무를 예로 든 바 있다.
연인들이 서로 손을 잡을 때 그들은 상대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손을 만지지만, 만지는 손이 나의 것이 아니라 그(그녀)의 것이라는 사실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따라서 애무의 본질은 하나 됨이 아니라 둘 됨에 있으며, 나의 손에 완전히 쥐어지지 않은 상대의 손을 만지는 행위이다.
그래서 연인들의 애무는 갈망에 가까우며, 너무나 큰 위장을 가져 아무리 먹어도 배가 차지 않는 식사와도 같다.
사랑하는 상대를 아무리 만져도 더 만지고 싶고, 더 만져도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을 느꼈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애무는 연인이 얼마나 가까운 존재인지를 증명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인지를 동시에 경험하게 한다.
애무를 통해 나는 연인을 소유하고 장악하거나 거머쥘 수 없다.
나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신비로운 미지의 지점, 즉 타자적 존재를 열정적으로 좋아하는 행위가 사랑이다.
코코슈카는 알마와 섹스를 나누면서도 왜 알마를 놓치는 것일까?
성적 접촉을 통해 알마를 완전히 나의 것, 나의 손길이 온전히 미칠 수 있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이다.
코코슈카는 영원한 사랑이 아니라면 그것은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여겼을지 모른다.
코코슈카의 사랑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의 현실에서도 수많은 코코슈카를 찾아볼 수 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상대도 나를 사랑해야 하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해야 하며, 나와 같은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 아니라, 나와 같은 미래를 설계해야 사랑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그가 타자성을 갖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랑은 실패하게 된다.
이별이 사랑의 실패가 아니라, 사랑하는 상대를 나의 영역으로 동일화하는 것, 그것이 사랑의 실패이다.
나의 모순적 정체성과 상대의 타자적 성격을 이해할 때 사랑은 가능하다.
따라서 내가 누구인가, 사랑하는 상대가 누구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끊임없이 할 때 사랑은 실현된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9권 『사랑, 삶의 재발명』(임지연 著)에 수록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마이크로 인문학 Micro Humanities
일상에서 마주치는 질문들
은행나무 마이크로 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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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생각, 의식의 소음 ─ 김종갑
02 죽음, 지속의 사라짐 ─ 최은주
03 선택, 선택의 재발견 ─ 김운하
04 효율성, 문명의 편견 ─ 이근세
05 질병, 영원한 추상성 ─ 최은주
06 혐오, 감정의 정치학 ─ 김종갑
07 자아, 친숙한 이방인 ─ 김석
08 기억, 기억과 망각의 이중주 ─ 서길완
09 사랑, 삶의 재발명 ─ 임지연
─ 이 시리즈는 몸문화연구소와 은행나무출판사가 공동으로 기획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