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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랑이 안 변하니?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영화 「봄날은 간다」(2001)

낭만적 사랑은 영원성을 추구한다. 낭만적 사랑을 추구하는 연인들은 변치 않는 영원한 사랑을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가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이야기는 ‘사랑에 빠진다-사랑의 방해물이 곳곳에 있다-사랑은 견고해진다-커플들은 죽는다-사랑은 영원히 지속된다’의 구조로 짜여 있다. 사랑에 빠진 커플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허락지 않는 세상을 등지고 영원한 사랑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영원한 사랑의 왕국은 죽음이나 기억을 통해 만들어진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자기와 상대의 정체성보다 영원한 사랑을 우위에 둠으로써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은 불가능하다. 낭만적 사랑이 지향하는 영원성은 감정의 불변성과 같은 말이다.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 느꼈던 황홀함의 감정이
변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지속될 수 있는가?


사람은 삶의 과정 속에서 변하기 때문에 그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 역시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싫어질 수도 있고 더 좋아질 수도 있으며, 감정의 색깔이 달라질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과 관계가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영원함의 출발지가 사랑의 도입부라는 점에서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주인공 베르테르는 로테와 처음 춤을 추었을 때의 기억을 사랑의 원형으로 생각한다. 그는 로테와 춤췄을 때 입었던 푸른 연미복을 낡을 때까지 입다가 마침내 똑같은 옷을 새로 맞추어 입는다. 그리고 땅속에 묻힐 때 푸른 연미복과 노란 조끼를 입은 채이고 싶다고 말했으며, 결국 자살할 때 그 옷을 입었다.

베르테르는 로테와 처음 사랑에 빠졌을 때의 기억을 사랑의 기준점으로 삼았기 때문에, 로테를 잃은 슬픔을 제대로 애도하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사랑이 막 시작되던 때의 감정은 황홀하고 강렬하지만,
결국 변하고 만다.
그것은 사랑의 배신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삶 속에 존재하는 사랑이기 때문이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밑바탕이 된 괴테의 실화를 다룬 영화 「괴테」(2010)


 사랑에 막 빠진 사람에게서는 거의 화학 공장 수준으로 호르몬이 분비된다고 한다.

도파민은 사랑의 첫 단계에서 상대방의 얼굴만 보아도 행복하다고 느끼게 한다. 

페닐에틸아민은 사랑에 깊이 빠졌을 때 분비되어 천연 각성제 역할을 할 만큼 황홀감을 준다.

옥시토신은 성적 흥분, 짝짓기, 오르가슴을 유발하는 호르몬이다.

엔돌핀은 사랑의 안정 단계에서 분비되는데, 몸뿐 아니라 마음으로 사랑을 느끼게 하는 행복 호르몬이다.

어쩌면 사랑은 호르몬의 효과인 만큼 물리적 작용이기도 하다. 

비극적이게도 사랑의 호르몬은,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30개월 정도가 지나면 대뇌에 항체가 생겨서 더 이상 분비되지 않는다고 한다. 과학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랑의 감정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마치 모든 인간이 유아기를 지나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맞이하는 것처럼 말이다.


사랑을 다룬 고전적 영화 「봄날은 간다」(2001)에서, 상우는 사랑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어 하지만 은수는 사랑이 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이 생겨 헤어지자는 은수의 말에 상우는 깊은 상처를 입은 채 묻는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영화 「봄날은 간다」(2001) 중에서


사랑에 막 빠진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은 변하지 않아야 하고, 너는 나를 ‘죽을 때까지 사랑해야 할 뿐 아니라, 사랑의 호르몬이 펑펑 분비되면서 생기는 사랑의 열정을 유지해야 진정한 사랑’이라고 믿기 시작한다. 그래서 상대가 관심을 늦추거나 바쁘다고 약속을 미룰 때, 이렇게 말한다. “너, 변했어!”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황홀함으로 정신이 혼미한 사랑의 초기를 기준점으로 놓는다면,
모든 사랑은 ‘변한다’, ‘식는다’로 표현할 수 있다.


사랑에 막 빠진 초기에는 상대는 성스러운 존재처럼 후광이 나고, 연인과 함께하는 세상은 찬란하다. 그러나 연인들이 살아가는 세계는 변화하는 시공간이며, 사회와 역사가 아로새겨지는 구체적 삶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에서 연인들의 정체성은 변화하고, 감정과 관계도 변화한다. 여기서 변화란 퇴색함이 아니라, 양상의 달라짐과 질적인 것의 변화무쌍함을 말한다.

그러니 사랑의 감정 역시 초기와는 달라진다. 초기 사랑의 세계는 오로지 그대만이 있는 세계인데, 이 세계에서는 먹고 자고 싸우고 일하는 사회적 관계가 삭제되기 쉽다. 그러므로 사랑은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반복해서 선언되고 새롭게 발명될 때 빛을 발한다.

베르테르가 행한 사랑의 오류는 첫눈에 반했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기원을 첫눈에 반한 그때로 환원했다는 점을 상기하자.

베르테르는 정말 로테를 사랑한 것인가? 

특정 순간에 박제된 로테를 사랑한 것인가? 

사랑에 빠진 자신을 사랑한것인가?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한 것인가? 

베르테르는 로테가 어떤 인간인지 알기나 할까? 

베르테르와 모든 점에서 다른 로테의 개성과 차이를 탐구한 적이 있을까? 

내가 보기에 그는 사랑에 빠져 더 깊어진 자신의 내면세계만을 탐색한 것 같다. 그러니 살아서 변화하는 로테를 베르테르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감정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자살에 이르렀다.


우리의 사랑은 삶 속에서 지속될 수 있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어야 한다. 즉 어떤 사랑인가가 중요하다.

베르테르가 추구한 영원한 사랑이란 단둘만이 머무는 폐쇄적 공간이다. 둘만의 왕국에 영원히 머물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은 빈약해진다. 둘만의 정원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그 달콤함을 향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랑의 정원은 사회와 역사로부터 단절되면 시들어가기 마련이다. 사랑의 정원은 비와 햇빛과 바람과 물이라는 외부적 자양분으로 풍요로워질 수 있다.



*이 포스트는 마이크로 인문학 시리즈 9권 『사랑, 삶의 재발명』(임지연 著)에 수록된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사랑과 기억에 관한 마이크로 인문학' 매거진은 11화를 마지막으로 연재 종료됩니다.

그간 즐거이 읽어주시고, 이야기 나눠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본질적으로 아플 수밖에 없고 '둘 됨'을 이뤄야만 하는 사랑에 관해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10월 19일(목), 사랑 편의 밑바탕이 된 《사랑, 삶의 재발명》을 쓰신 임지연 선생님의 북콘서트가 진행됩니다.

북콘서트에 매거진 구독자 여러분을 초대하오니,

브런치를 통해 나누지 못한 사랑의 다양한 질문들을 나누는 시간에 참석해주시기를 바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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