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
돈 쓰고 시간 써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고 나서야 내가 러시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가슴 깊이 깨달았더랬다. 여행 전 누군가 러시아 역사책을 권해줬는데, '가이드북도 못 읽었는데 역사책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무식하여 용감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어차피 자유여행인데 러시아 미술사라도 한 권 볼 걸, 현대사라도 한 권 들고 올 걸 하고 매일 같이 후회했다.
그래서였을까. 모스크바로 이동하고 나서 현대사 박물관은 꼭 가봐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사전 지식이 없다면 현지 정보로라도 채워보려는 마음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러시아 현대사는 워낙 혁명, 전쟁, 영광, 상처 그리고 통합과 분열 같은 역동적이고 뜨거운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이라니 그 이름부터 기대되는, 붉게 물든 박물관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역사가 진짜 뜨거웠는지 어땠는지는 별개로, 그날은 일단 해가 너무 뜨거웠다. 모자는 진작에 잃어버려 정수리가 타들어가는 것 같았고 나는 혼자였다. 지하철 출구 쪽의 공사 때문이었는지 길을 헤매느라 뙤약볕 아래 약간의 탈수 증상을 느끼며 걸어야 했다. 이십 분쯤 지나자 나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관광객'이라고 써붙인듯한 땀에 절을 몰골이 되었다.
이 박물관은 관광객들에게 인기 있는 박물관은 아닌지 관광지도에도 안내가 잘 나와있지는 않다. 관광지구에 있는 것도 아니고 외따로 떨어져 있는 편이라 일정이 짧은 여행객들이 오기에는 쉽지 않을 터. 거리 전반의 분위기를 보니 뭔가 역사가 있는 구도심으로 보였다. 관공서 지구가 아니었을까 추정해보지만 러시아어라고는 한 글자도 읽을 줄 모르는지라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도착한 박물관은 기대보다 더 소박했다. 뭔가, 예상보다 더 날 것의 모습이었다. 그동안 두 도시에서 다녔던 화려하게 복원된 궁전과 성당들의 매끈하고 철저한 느낌과는 크게 다른 경험의 박물관이었다.
영어경시 풍조라도 있는 건지 워낙에 영어 안내나 영어 간판이 없는 모스크바이건만, 이 박물관은 외부 담벼락에 영어뿐 아니라 중국어로도 '박물관'이라는 안내를 써 두었다. 게다가 건물 정면에 "Museum"이라는 영어단어가 플랭카드로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관광객을 유치하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뭔가 왜 관광객이 없는지 알 것 같은 그런 박물관이었다. 그리고 내부에는, 영어가 없다.
일단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세계대전 정도는 가볍게 뛰었을 것 같은 올드한 장갑차를 만날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조잡한 느낌을 주는 귀여운 녀석이었다. 실내로 들어간 뒤로는 사진 촬영 금지였던 관계로 실내 사진은 없다. 내가 그렇게 질서를 잘 지키는 대단한 세계시민은 아니다. 하나 박물관이 너무 텅 비어 있었던 관계로 곳곳에 배치된 큐레이터들이 나만 쳐다보다 못해 나를 따라다니는 지경에 이르렀기에 사진을 찍을 엄두를 못 냈던 것뿐이다.
박물관 내부는, 딱 입구의 장갑차만큼 올드했다. 결코 나빴다는 얘기는 아니다. 흥미로운 무기, 복식, 문서, 가구, 장식품 등이 소소하고 많았다. 하지만 아무래도 1990년 정도에 기획되고 그 후에 한 번도 재구성되지 않은 게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드는 그런 올드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영어 설명을 기대할 수 없고 이해할 맥락도 없었으니 전시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물론 뭐 아는 게 없는 내 문제도 있었겠지만 전반적인 전시체험이 친절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박물관의 물건들을 통해서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박물관 자체가 '역사'의 느낌이었다.
1900년대 초반이면 고작 백 년 전인데 이백 년 전 같은 느낌을 주는 복식과 소품에 놀랐다. 그 와중에 러일전쟁 당시 일본군 군복도 있었는데 딱 임진왜란 때 왜군 갑옷처럼 생겨서 더욱 놀랐다. 현대사 박물관 맞는가. 생각보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의 기록이나 물건이 많지 않아서 섭섭했다. 1900년대 중반의 낫과 망치가 함께 타오르는 이미지들을 너무 기대했던 모양이다.
이건 좀 잡담인데, 나는 전시장에 들어서기까지 나는 4명의 박물관 직원을 만났었다. 한 명은 텅 빈 전관에 혼자 서서 방문객 보안검사를 하는 보안직원이었다. 정말 심심해 보였다. 두 번째 직원은 정원을 50미터쯤 가로질러 만나게 되는 박물관 건물 입구에서 작은 티켓을 팔고 있었다. 작은 책상을 하나 두고 작은 의자를 놓고 앉아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 직원은 그 작은 책상 바로 옆에 붙어있는 작은, 아주 작은 기념품샵 직원이었다.
현재까지 등장한 총 3명이 하는 일은 1명도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나는 좁은 계단을 한 층 올라가서 네 번째 직원을 만나게 된다. 티켓을 받는 사람이다. 티켓을 파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는 오로지 좁은 계단 하나밖에 없다.
출입구를 간단히 만들면 이 4명이 하는 일을 한 사람이 할 수 있다고 감히 장담할 수 있다. 아니, 화장실도 가야 하니 교대인원 고려하여 2명. 대체 왜, 4명이나 필요한가. 짐작컨대 기념품샵에서 한 달 동안 올린 영업이익은 그 기념품샵에 근무하는 직원의 일당 정도에 불과할 것이다. 기념품 샵은 엽서나 코인 정도에 기념품 몇 가지를 파는 정말 작은 샵이었다.
나는 새삼, '러시아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곳에 앉아 있는 근로자들이 많다'는 누군가의 설명을 새삼 이해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생판 남의 나라에 와서까지 인력운용의 효율성에 대해서 고민하는 자본가 마인드가 되어있는가 잠시 성찰도 했다.
박물관을 나서기 전, 기념품샵에서 포스터를 두 종류 샀다. 위 두 사진이다. 장당 몇 백 원에 불과했다. 너무나도 사랑스럽지 않은가. 왼쪽은 러시아의 우주비행 관련 기념 포스터인 것 같고, 오른쪽은 뭔가 체육대회와 관련된 게 아닌가 싶은데 역시 해독이 안 되니 추정만 할 뿐이다. 특히 오른쪽 포스터 색감이 독특하고 아름다워서 자꾸 쳐다보게 된다. 조만간 액자를 사 와서 부엌 벽에 걸어둘 계획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이 러시아 현대사 박물관이 별로였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추천하고 싶다. 나는 여전히 러시아적인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이곳은 실로 러시아적이었다고 느꼈다. 어딘가, 좀 더 내부로 한 발 들어왔다가 나온 기분이었달까. 낯설고 조금은 오래된 향이 났다. 1900년대는 이렇게 너무나 멀고 오래된 시절이 되었구나 싶어서 나이가 든 기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