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지지 않는 사각의 하얀 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여름은 백야의 계절이다. 6월에 절정에 이른다지만 7월을 지나서도 계속된다. 내가 도착한 건 7월 21일. 절정이 지났다기에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해가 좀 늦게 지는 정도겠지. 그건 영국에 머무르던 여름에 겪었으니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녁 열 시인가 열 시 반인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항 유리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그 무관심은 감탄으로 바뀌었다. 밤하늘이 파랬다. 낮처럼 파란 것이 아니었다. 마치 해가 지는 아침처럼 밝고 파랬다. 밝다. 밝고 희다. 그런데 낮과 같지는 않았다. 이 밤은 뭐지.
가로등을 켤 필요가 있을까 싶었지만 사방에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다. 해가 지려는 찰나에서 시간이 멎은 것 같기도 했다. 낮의 열기는 가시고 서늘해진 공기가 밤이라는 걸 알려주고 있었다. 호텔에 들어가서 바로 씻고만 싶었는데 하늘을 보는 순간 심장이 좀 더 빨리 뛰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런 아름다운 밤에 잠들어야 하다니...
첫날은 다른 도리가 없으니 호텔에 도착해서 잠들었다. 위 사진은 둘째 날 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동행과 맥주 한 잔 하러 나선 밤의 거리다. 십 년만 젊었어도 결코 잠들지 않았을 것 같은 밤. 내 숙소는 넵스키 대로 끝이었다.
해지는 넵스키 대로의 명물들을 보며 백야 관광의 명소라는 궁전 다리까지 걸어가는 건 한 시간이면 충분했을 것이다. 하지만 넵스키 대로에 만족하는 걸로. 궁전 다리는 백야 시기 밤마다 축제 분위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고 나니 어느 한 새벽을 궁전 다리를 향해 걸어가 볼걸 그랬다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백야의 하늘은 날씨에 따라서 다르게 보인다. 맑은 밤은 푸르고 흐린 밤은 희다. 매일 밤 다른 색과 느낌의 하늘을 볼 수 있다. 백야의 절정이었다는 6월 보다는 오히려 절정을 살짝 지났던 이때가 더 다양한 얼굴의 밤하늘을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흘, 나흘이 지나며 해가 지지 않는 하얀 밤하늘은 묘하게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빛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지는 것이다.
시차적응이 다 되지 않아 잠이 깊지 않았다. 새벽 서너 시에 눈을 떴는데 숙소 암막 커튼 틈 사이로 보이는 사각의 하얀빛. 마음에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슬그머니 피어난다. 첫 숙소는 오래된 건물을 모던하게 수리한 곳이었는데 묘하게 차가운 고립감을 주는 공간이었다. 낯선 나라, 낯선 방에서 혼자 잠들었는데 잠에서 깬 새벽에 하얀 하늘을 만나는 것이다. 기분이 희고 묘했다.
어두운 밤하늘이 주는 안도감을 새삼 느끼게 해 준 것이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백야였다. 허나 하얀 밤하늘에 대한 묘한 두려움은 해가 지는 모스크바로 이동한 후에는 곧 그리움으로 변모되었다. 잠은 아침에 좀 더 자도 충분했던 것을, 하염없이 밝은 밤거리를 헤매며 좀 더 즐기지 못한 걸 후회하게 된다.
백야가 선사하는 여름밤의 묘한 들뜸을, 매일 밤 다른 얼굴의 밤하늘을 꼭 다시 만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