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자유여행을 다녀왔다는 얘기, 그리고 사실상 혼자 돌아다녔다는 얘기를 하면 "안 위험해요?"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다. 나도 예전에는 러시아 유학이나 거주하셨던 분들에게 모스크바의 마피아나 범죄, 인종차별 문제 등을 들은 적이 있어서 이미지가 좋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번 여행을 다녀오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도심 주요 관광지에는 총 들고 다니는 경찰인지 군인인지가 돌아다니고 웬만한 박물관이 성 같은 실내 관광지는 입구에서 가방 검색까지 다해요. 그러니 매우 안전하죠."
"그게 안전해요?"
"관광객을 쏘진 않을 거잖아요. 검문검색이 잦으니 군중 사이에 흉기를 가진 사람도 없을 거고."
"그래도 총 있고 그러면 분위기가.."
"안전하냐의 감각의 기준은 '나'죠. 나를 공격하거나 괴롭힐 것인가. 공권력은 외화벌이에 도움될 외국인 관광객은 먼저 공격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으니 그 총이 무섭지 않아요."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관광지 위주로 다닌다면 웬만한 서유럽 도시 정도로는 안전하지 않을까. 관광객들로 가득한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당연히 그렇고 거대한 도시인 모스크바도 그랬다. 기차를 타고 외곽으로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곳의 느낌도 그저 평화로웠다.
러시아 사람들이 결코 친절한 이미지라고 할 수 없다. 애들조차 차가운 표정이었다. 또 러시아 사람들은 전체적으로 체격이 나보다 크고 치안도 한국보다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난 관광객으로서도 그랬고 '동양인 여성'으로서도 안전하다고 느낀 편이었다.
사실 이전에 이슬람권 국가를 여행할 때는 덜 안전하게 느껴졌다. 비단 나만 느낀 건 아니고 이집트며 터키며 여자 혼자, 또는 여자들끼리 자유여행을 간 경우에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 같다. 집적거림이나 희롱은 물론이고 여자만 있는 경우에 쓸데없는 관심과 무시가 쉽게 동행하는 것을 느끼곤 했다.
십 년 전쯤, 여행을 다니다가 그런 농담을 들었다. 바가지나 소매치기를 예방하려면 중국인인 척하고, 대접받으려면 일본인인척 하라던가. 일본인은 돈이 많을 거라는 이유로 타깃이 되기 쉬운 한편, 일본인 관광객은 잘못 건드리면 외교적 문제가 되기 때문에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는 믿음이 있는 것 같았다.
낯선 도시를 안전하게 느끼게 하는 건 '무관심'인 것 같다. 특별히 타깃이 되지 않는 익명의 존재로서 존재할 수 있게라는 무관심.. 그런 의미에서 모스크바는 익명의 존재가 되기 쉬운, 서로 무관심한 대도시였다.
나는 주로 대중교통을 타고 다녔고, 밤늦게 돌아다닌 편은 아니었지만 공연을 보고 늦는 경우도 있었다. 구글 번역기 돌려가며 현지에서 서커스 예매도 했었다. 이 날, 동행이 배탈이 나서 인터미션 때 혼자 돌아가버리는 바람에 혼자 늦은 시간에 다녔다. 이날 밤도 기억에 남는다.
끝나고 나오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하철 역이 멀지는 않았지만 길도 어두웠고 우산이 없어 곤란했다. 가족 단위로 나들이 지역민들과 함께 찰박찰박 비에 젖은 길을 걸었다. 간식을 챙기고 우산을 챙겨 서커스를 보러 온 가족들의 소박함과 단란함이 인상적이었다. 서커스장은 뭔가 이 동네 노동계급 특성이 결집된 것 같은 장소였다. 공연 내용도 어딘지 그러했다. 단선적인 환상과 꿈.
전철을 갈아타가며 호텔로 돌아오니 도심 호텔 숲 사이에 세련된 정장의 도시 남녀들이 노천 바에서 삼삼 오오 모여 맥주 한잔씩을 나누고 있었다. 낮처럼 밝고 깨끗한 거리와 빛나는 빌딩들. 설명하기 어려운 그 두 장면의 격차가 인상적이었다. 기시감이 느껴지는 격차였다.
요약하자면 모스크바도 비교적 평범한 자본주의 도시였다. 즉 앞 골목, 뒷골목, 옆골목 모습이 다른 그런, 부유하면서 부유하지 않고 안전하면서 안전하지 않기도 한 그런. 그게 모스크바에 대한 기억이다.
* 물론, 어느 도시를 가건 지갑과 가방은 늘 조심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건 당연지사. 소매치기와 절도로 나나 동행이 고통받은 경우는 선진국 여부나 도시의 크기를 따지지 않았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닐 것 같은 어리바리한 관광객으로 분류되면 타깃이 되기 쉽다. 외국에서 소매치기 당해서 경찰서 돌아다니는 건 하루를 날려먹는 골치아픈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