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둘레길 완주기 3] 4코스 대모산-우면산 코스
서울 둘레길 도전의 두 번째 코스는 4코스로 골랐다. 4코스인 대모산-우면산(수서역-사당역) 코스는 2개의 세부코스로 나눠져 있고, 이틀에 나눠 걸었다.
5월 31일. 4-1코스 대모산
지금도 이 날을 생각하면 헛웃음이 난다. 실로 인생의 위기였다. 기분 좋게 집을 나섰다가 만신창이가 되어서 돌아왔다. 걷다 죽을 뻔했다. 그랬으면 얼마나 창피했을까. 달리다 죽는 것도 아니고 걷다가 죽다니. 대대로 집안 망신으로 남았을 거야.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고 피로, 배고픔, 목마름이 함께 찾아왔다. 물론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이다만, 나는 진지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문제의 원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체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강행했다. 이틀에 걸쳐 3코스를 완주한 바로 다음날, 체력이 고갈된 상태로 바로 4-1 코스에 도전했다. 물 들어온 김에 노 젓는 심정이었다. 느낌 왔을 때 계속 걷자는 마음으로 집을 나선 것이다. 다른 코스도 3코스 같은 평지의 꽃길만 있는 줄 착각하고 할 만하다 싶었던 것이지. 그런데 피로가 누적된 데다 발은 물집이 잡히기 시작했다. 하루는 쉬었어야 했는데 본인의 체력 상태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
둘째, 지형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없이 시작했다. 3코스는 한강 공항과 도시공원과 이어진 길이라 걷다가 편의점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고, 가는 길에 커피숍에 앉아서 쉴 수도 있었다. 4코스도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4-1은 산책길이라기보다는 등산길에 가까운 숲길의 연속이다. 특히 4-1코스는 일단 시작하면 끝날 때까지 사실상 탈출구란 없다. 사람 살려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의지로 포기하지 않은 게 아니라 포기할 방법을 몰라서 포기하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직진, 그저 직진이었다.
셋째, 너무 아무 준비 없이 갔다. 수분과 당분 준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이건 정말 부끄러운 얘긴데 생수 한 병들지 않고 빈손으로 출발했다. 얼핏 약수터가 있다고 본 것 같으니 걷다가 약수나 마시면 되지 했던 것이다. 고생 끝에 도착한 약수터에 "수질검사 부적합" 딱지가 붙어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갑자기 높아진 기온, 익숙하지 않은 오르막, 게다가 꽃가루 때문인지 가벼운 재채기까지 시작되었다. 가방에 초코바가 하나 있긴 했는데 목이 까끌거려 삼킬 수가 없었다. 코스 중간 무렵부터 탈수가 왔던 것 같다.
힘들긴 했지만, 4-1 코스는 객관적으로 멋진 곳이다. 경치도 좋고 길이 굉장히 잘 정비되어 있어 가족 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도 다수 눈에 띄었다. 숲과 나무를 깊고 조용히 즐길 수 있도록 길이 안전하고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니, 이 동네 사는 사람들은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강남구잖아? 강남구가 주거지역으로서 가진 장점을 하나 더 발견했다. 꼭 서울 둘레길 아니더라도 대모산과 우면산과 연계전 산책길들은 전철에서의 접근성도 좋다.
대모산 맨발 걷기 숲길 힐링 체험이라는 프로그램도 진행되는 모양인데, 최근엔 코로나 때문에 일시 중단 중인 것 같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혹은 동호회를 통해서 맨발 걷기 체험하는 사람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처음에 한 두 명 보고는 놀랐는데, 십여 명이 줄지어 맨발로 다니는 걸 보고서는 그만큼 안전한 길이구나 싶어 안심했다.
하지만 숲길 사진은 남은 게 없다. 평지에서 찍은 사진이 대부분이다. 오르막이 시작된 뒤에는 그저 좀비처럼 걷느라 사진 찍을 여유도 없었던 모양. 그나마 전망대에서 찍은 사진이 한 장 있다. 저 멀리 롯데월드타워가 보인다. 넋 놓고 걷고 걷다 보니 요란한 자동차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문명에 가까워진 것이었다. 자동차 소음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집에 어떻게 돌아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좀비처럼 전철을 타고 돌아왔다
이 날, 스마트 워치에 따르면 약 80층 높이를 오르고 2만 5 천보를 걸었다. 스스로의 체력에 대해 객관적으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며 냉찜질을 했다.
6월 3일. 4-2코스, 우면산 코스
체력은 없어도 근성은 있다. 앞서 언급한 3가지 성찰과 반성을 바탕으로 4-2 코스는 드디어 사전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 하루 정도 쉬었고, 든든하게 밥을 먹었고, 간단한 도시락을 쌌다. 토마토, 메추리알, 햄치즈빵, 그리고 버터를 듬뿍 바른 모닝빵을 챙겼다. 커피와 스포츠 음료도 구매하였고 초코바와 초콜릿도 챙겼다. 김밥 한 줄을 사 갈까 했지만 기온이 높아서 상할까 걱정돼서 다음을 기약했다.
소가 잠자는 모양을 닮았다는 우면산의 둘레길 코스는 대모산 코스와 유사한 구성이지만 좀 더 짧고 가벼운 편이다. 오르막 구간이 적지는 않지만, 깔끔하게 정비된 양재 시민의 숲도 구간도 포함되어 있어서 전체적인 난이도는 4-1보다는 낮은 편이다. 이 코스도 숲길이 근사하다. 한국적이면서도 묘하게 이국적인 풍경이 펼쳐지는 숲길을 천천히 즐기면서 걸으면 "여기 서울 맞아?"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4-1 코스보다는 편하게 왔지만, 발에 잡힌 물집 때문에 마지막엔 좀 절룩거리며 걸었다. 안 그래도 몰골이 말이 아닌데 절뚝이기까지 하니,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길 위에 체면 같은 건 딱히 없다. 너나 나나 걷는 사람들이고, 걷는 동안은 모두 평등하게 땀 흘리고 전진한다. 그리고 전진하기만 하면 걷기가 수행된다. 달리기보다 걷기가 좋은 건 그래서 일거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4코스를 이틀에 걸쳐 무사히 마무리했다. 위기는 넘긴 것 같고 완주를 향한 도전은 계획대로 계속된다.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에 오전 시간을 활용해야 할지, 좀 쉬어가야 할지 고민을 시작하게 된 시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