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기심이 많은 성향으로 사람들을 만나면 질문을 하고, 질문에 답하는 것을 즐긴다. 하지만,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고밀도님, 무슨 일 하세요?
이 질문은 나를 망설이게 한다. 망설임의 결과로 그때 그때 답이 달라지는데,대답을크게 3가지로 분류해 볼 수 있다.
애매모호형. “IT 쪽에서 일해요.” 이름을 대면 알만한 대기업에 다니고 있지만, 바로 회사의 이름을 말하면 겸손해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러한 이유로 이런 애매한 대답이 나온다. 질문한 사람도 원하는 대답이 아니기에 추가 질문이 나올 때가 많다. “IT 어느 쪽이요? 판교에 계세요?”등등.
일시적 정답형. “요즘 ESG를 해요.” 회사에서는 매년 진행하는 프로젝트의 테마가 바뀌는데, 질문을 받은 시점에 담당하고 있는 프로젝트 테마로 대답을 대신한다. 하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지금 담당하고 있는 일이니 틀린 말을 아니지만, 질문을 받는 시점에 따라 나의 답은 달라질 것이다. 친한 친구들도 조차도 가끔씩 “정확히 너는 어떤 일을 하는 거야?”라고 묻곤 한다.
동문서답형. “00 기업에 다녀요.” 이 대답은 완전히 동문서답이다. “무엇”으로 밥벌이를 하냐고 물었는데, “어디”에서 밥벌이를 하는지를 답한다. 하지만 이 대답이 가장 편하다. 이렇게 대답하면 사람들은 더 이상 내가 어떤 일을 하는지 묻지 않고 00 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15년째 일을 하고 있지만, “무슨 일=직업”에 대답하는 일은 어렵다. 그 질문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나서, 그제야 나는 직장은 있었지만, 직업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꽤 오랫동안 나의 직업이 “회사원”이라는 것에 큰 의구심이 들지 않았다. 월급이라는 안정된 돈을 받으며, 성실이 일하는 것을 나의 직업으로 착각했던 것이다.
직장은 내가 몸담는 곳이고, 내가 몸담을 곳을 옮기면 나의 직장도 변한다. 하지만, 직업은 쉽게 변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전문성이나 사회생활의 identity라고 볼 수 있다. 10년이 훌쩍 넘고 나서야 나는 “업”에 대해서 고민을 시작한다. 어쩌면 하나둘씩 “직장”을 떠나 새롭게 시작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을 더욱 자주 보게 되는 연차에 진입해서일지 모르겠다. (혹은 마흔 줄이어서 일지도?)
어쨌든, 이제야 직장인 아닌 직업을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동안 15년 동안 내가 했던 일에 대해 복기할 일이 많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여행이 될 것 같다. 과연 여행을 통해 어떤 직업을 갖게 될지 나조차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