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오르려는 물고기인지 고민하는 시간
'갑'이 되기 싫은 고과장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증거일까? 나이가 쌓이면서 자주 ‘갑’과 ‘을’이라고 불리게 된다. 어렵게만 느껴졌던 부동산 계약들도 몇 번 해내었고, 회사에서도 매 년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다 보니 최소 10번 이상 서면 상에 ‘갑’이 되거나 ‘을’이 되었다. 나의 담당업무 특성상 에이전시와 계약을 맺어서 부족한 일손을 채워서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에이전시와 일해본 경험이 있는지도 중요한 경력으로 평가가 된다. 손을 빌려서 일한다는 것이 생각처럼 간단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처음 에이전시와 계약을 하고 일을 하게 되었던 해부터 나는 ‘갑’의 위치에서 ‘을’에게 일을 주는 것이 불편했다. 그들은 대체로 나보다 더 많은 시간을 공부하고 해당 ‘필드’에서 더욱 경력이 많았으며 나이도 훨씬 많았다. 꽤 많은 금액의 계약이기에 당신들보다 어린 클라이언트를 늘 깍듯하게 대해줬고, 우리 입에서 나오는 단어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였다. 우리의 의견들을 참고해서 결과물에 담아야 평가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나 시간이 쌓이고 직급이 높아졌음에도 여전히 이런 관계가 불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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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차가 되었을 때, 유난히 힘든 과제를 맡게 되었다. 과제의 양이 상당히 방대했고 임원들의 관심도가 높은 과제였다. (그 뜻은 사공이 많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에이전시도 같이 고군분투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업체가 해오는 결과물들에 수많은 피드백을 줘야 했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일정이 밀렸고, 납기를 맞추기 위해 에이전시는 새벽 1-2시에 결과물들을 보내오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피드백을 주는 것이 나에게는 너무 괴로웠다. 팀원들의 피드백을 모두 모아서 보낼 때 ‘아, 이건 그냥 여기서 만족해도 괜찮지 않을까요?’ ‘아, 이걸 더 해오라고 하면 에이전시 분들이 힘드실 것 같은데……’ 내가 피드백을 전달하기 주저하자 선배가 그럼 자신이 보내겠다고 말을 해준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 ‘우리는 돈을 지불했고, 에이전시가 맡은 일을 해주지 않으면 이거 우리가 다 해야 돼. 에이전시에게 입장에서는 우리가 ‘갑’이지만, 회사에서 우리는 임원과의 관계에서 ‘을’이야. 우리 입장을 먼저 생각해.’ 사실이 그러했다. 회사에서 나는 철저하게 ‘을’로서 지시를 받고 그 일들을 처리해내야 했다. 내 기준에서 좋은 결과물일지라도 상사나 임원들이 보기에 별로이면 그냥 별로인 것이다. 그럼 나는 보고서를 다시 수정하여 생각의 ‘싱크’(사실 싱크가 아닌 그들의 마음 맞추기)를 맞춰야 했다. 그렇게 불편하고 미안한 갑과 을의 입장을 오가며 에이전시와의 계약이 끝날 때까지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나이 40이 되도록 잘 해내지 못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는데 그중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들을 나열하자면 이렇다. ‘남에게 부탁하기’, ‘말 놓기(아래 위 막론하고)’, ‘반항하기(부모님이든 상사든)’, ‘화내기(화내면 목부터 꽉 막혀 울먹여서 추한 꼴을 보임)’ 등이다. 부탁하는 것을 어느 정도 피하느냐 하면 휴가 갈 때 조차도 동료가 해줄 수 있는 간단한 전화 통화조차도 휴가지에 내가 모두 처리한다. 그래서 협업부서에서는 대체 휴가를 언제 가냐며 걱정을 해주기도 한다. 그뿐인가? 말을 놓는 것은 나에게는 또 하나의 난제이다. 한 회사 동료는 지속적으로 ‘말을 좀 놓고 친해지자’고 제안을 해주어서 겨우 말을 놓고 지낼 수 있었고 지금까지 아주 편하게 지내고 있다. 10년이 넘는 회사 생활을 하고 있지만 동기가 아닌 이상은 말 놓는 직장 동료들은 거의 없다.
시간이 지나 내공이 쌓이면 나도 카리스마 있게 멋지게 에이전시의 관계도 잘 풀어갈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 지난다고 과연 익숙해질 수 있는 것일까. 사회생활 10년 차, 곧 40세를 앞두고서야 나란 사람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하고 나서야 지금 하는 일이 나의 타고난 기질과 성격을 괴롭히는 일이 아닐까 생각이 머리를 든 것이다. 조직과 업무의 특성상 워낙 고년차 선배들이 많은 곳이어서 아직 ‘주니어’로 분류되기 때문에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기가 조금 늦게 도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동안은 나보다 선임자가 있었고, ‘갑’의 역할 수행을 해주고 있었다. 이제는 점점 그 책임이 나에게 옮겨올 것이었다. 에이전시를 어떻게 다루는지 어떻게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지 나는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가 회사 돈을 주고 에이전시에게 일을 맡기는 만큼 우리도 우리의 요구사항과 의견을 전달해야 좋은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다. 좋은 결과물들이 나와 줘야 에이전시도 다음번에 다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나란 사람의 탐색과 내가 있는 자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시점이. 어쩌면 앞으로 다른 미래를 그려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 시간 동안 해왔던 담당업무를 바꾸지 않는 한 에이전시와 일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일인데, 과연 나는 이런 불편한 관계들을 지속해낼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인 했던 말이 머리를 스쳐간다. ‘모두가 천재다. 나무에 오르는 재능으로 물고기를 판단한다면, 물고기가 멍청하다고 믿으며 평생을 살게 될 것이다.’ 내가 물고기이고 내가 하는 일이 나무를 오르려 했던 것은 아닌지 고민을 해보아야 할 때이다.
아직 해답을 얻은 것은 아니다. 봄이 되면 나는 또 ‘갑’으로서 에이전시를 찾아 계약을 해야 한다. 마음이 괴롭더라도 어쨌든 나는 그 일들을 해낼 것이다. 이 것은 나의 밥벌이이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에세이를 쓰기로 했다. 에세이 나의 지난 10년을 정리하다 보면 돌파구를 찾을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