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사라진 빨간 돼지저금통

순수함이 빚어낸 실수

by 고밀도

잠시 장을 보고 집에 돌아온 엄마는 거실에 있던 저금통을 찾았다. 꽤 통통했던 붉은색의 돼지 저금통이 사라진 것이다. 안이 살짝 비춰 보이지만 배를 가르지 않고는 한번 넣은 동전을 다시 꺼낼 수 없었던 저금통이었다. 우리 집 배불뚝이 TV 위에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잡고 있었고 그 안에는 십 원짜리부터 오백 원짜리까지 다양한 동전들이 가득했다. 곧 우리 가족은 함께 배를 가를 수 있는 기쁨을 나누고 맛있는 돼지갈비를 먹기로 했었는데 저금통이 사라진 것이다. 6살이었던 나는 천진난만하게 대답했다.


엄마, 불쌍한 오빠가 찾아와서 내가 다 나눠줬어.


나는 부모님께 배운 대로 어려운 사람을 도왔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며 대답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러했다. 동네 놀이터에서 놀던 나에게 초등학생으로 추정되는 한 남자아이가 접근했다. 자기는 불쌍한 사람인데 너무 배고프다고 혹시 도와줄 생각이 있냐며 집에 돼지저금통 같은 것이 있다면 아주 좋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불쌍한 사람은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냉큼 집으로 가서 무게가 꽤 나가는 돼지 저금통을 낑낑대고 들고 와서 통째로 넘겨주었다. 그 아이는 생각보다 큰 저금통에 놀랐지만, 자신의 파란 신발주머니에 돼지 한 마리를 담아서는 잽싸게 사라졌다.


엄마는 나에게 그 아이가 파란 신발주머니 들었고 줄무늬 상의를 입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놀이터를 중심으로 동네를 찾아 헤맸다.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않았기에 엄마에게는 그 저금통이 가뭄의 단비였다. 엄마가 찾을 때까지 돼지의 배가 무사하기를 바랐을 것이다. 잽싸게 사라졌던 아이는 문방구며 동네 슈퍼에서 먹고 싶은 군것질을 모두 사 먹는 호사를 누리고 남은 돈을 파란 주머니에 담아서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고 있었다. 엄마는 문방구 앞에 있는 오락기 앞에서 게임을 하느라 넋이 나간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함께 우리 집 앞으로 와서 나에게 ‘이 오빠가 맞니?’하고 물었다. 내가 그렇다고 하자 엄마는 ‘도둑질은 나쁜 것’이라고 꾸짖고 파란 주머니에 남아 있던 얼마 되지 않는 동전을 돌려받았다. 나는 순간 불쌍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 나쁜 짓을 한 도둑을 도와줬다는 생각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제 나는 누군가를 도울 때 더는 헛다리 짚지 않는 철저한 어른이 되었다. 지하철에서 가끔 마주하게 되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람들을 꼼꼼히 살핀다. 거짓 호소인지 의심부터 하고 웬만해서는 지갑을 열지 않는다. 매월 일정액을 기부하려고 결심을 했을 때도 정말 내 돈이 필요한 곳에 가는지를 꼼꼼히 따졌다. 어수룩하게 사람을 돕던 그 모습은 이제 찾기 힘들어진 것이다. 이제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을 돕게 되는 실수는 하지 않게 되었지만, 그 사람의 처지를 보이는 그대로 믿지 않고 의심하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다. 가족들과 모이면 늘 회자하는 나의 실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그리움을 자아낸다. 비록 잘못된 도움이었지만 사람을 도와주려고 했던 그 마음만큼은 너무 순수하고 따뜻했다. 요즘처럼 서로 의심하고 신뢰하기 힘들어진 세상을 마주할 때면 6살 어린 시절 나의 실수가 그리워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감당하지 못할 것 같은 기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