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이라는 키워드는 어느 날 느닷없이 내 삶을 비집고 들어왔다. 날씨가 아주 좋았던 가을날, 친한 친구의 울먹이는 전화를 받았다. 친구 아빠의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이었다. 그동안 암으로 투병 중인 엄마를 둔 내가 친구에게 위로받던 입장이었다. 예상치도 못한 슬픈 소식에 나는 어떤 말로 친구를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하지만, 정확히 한 달 뒤, ‘죽음’은 나에게도 찾아왔다. 암이 폐와 장까지 확장하면서 엄마는 음식을 잘 섭취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의사 선생님은 아직은 더 버텨낼 힘이 있다고 했었다. 엄마의 끝이 점점 다가오는 것을 느꼈지만 이렇게 코앞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엄마는 잠시 숨이 차서 입원했을 뿐인데, 하루아침에 중환자실로 향하고 2주를 버티지 못하고 떠났다.
겨울이 채 되기도 전에, 나는 두 번의 죽음을 지켜봤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갑작스러운 죽음과 암 투병으로 서서히 고통받으며 떠난 죽음. 어떤 이는 고통 없이 떠나는 것이 다행이라고 했고, 어떤 이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할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했다.
하지만, 둘 다 틀렸다. 죽음 앞에서 다행인 것 없었다. 죽음은 여전히 고통스럽고 다행인 구석을 찾아볼 수 없다. 내가 겪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해 감히 이야기할 수가 없다는 것을 엄마의 죽음을 경험하고 나서야 알았다. 지난날 혹시나 내가 죽음에 대해 내뱉었을지 모르는 말들을 복기했다. 고통 없이 가셔서 다행이라고, 이제는 고통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편히 가셔서 다행이라고. 내가 죽음에 대해 했던 말들이 나를 찾아왔다. 그 문장은 잘못된 것이었다. 죽음 앞에 다행인 것은 없었다.
엄마의 마지막 2주는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다. 아직도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고통스럽다. 산부인과 병동에 울려 퍼지던 ‘블루코드’의 음성. 엄마가 절대로 하고 싶지 않다고 당부하던 기도삽관을 순식간에 ‘당하고’ 중환자실로 사라지던 엄마. 2주를 고통 속에 몸부림치다가 떠난 엄마. 엄마의 죽음엔 아무것도 다행인 것이 없었다.
다행이라는 말은 죽음과 어울리지 않는다. 다행과 죽음은 절대 어울릴 수 있는 짝이 아니라는 것을 죽음을 경험하기 전에는 미처 몰랐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다고 했던들, 죽음을 더 우아하게 맞이할 수 있었을까? 다만, 죽음은 불가항력의 것이며, 준비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죽음’을 만났을 때 조금 덜 당혹스럽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각자 죽음으로부터 몇 발자국 거리에 서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이 글이 죽음에 대해 조금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를 준다면 좋겠다. 그동안 죽음에 대해 말하면 그것이 순식간에 우리와의 거리를 좁힐까 봐 나누지 못했던 시간이 아쉽다. 엄마와 죽음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것은 엄마가 떠나고 후회되는 수백 가지 중에 하나다. 적어도 이 글을 읽은 사람은 한가지 후회를 덜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