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이 생겼다.

선을 넘지 말아야 할 단어들

by 고밀도

인생의 여정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경험을 한다. 경험의 범주에 따라 서로의 이해가 제각각 다르다. 경험이 비슷한 사람들은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기도 한다. 암 환자의 가족으로 살아가던 시절, 암 환자를 위한 카페는 그 어떤 관계들보다 큰 도움과 위로가 되었다.


한번은, 난소암의 치료 정보를 절실히 찾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도 난소암 투병을 하는 엄마를 둔 딸이었다. 나이도, 얼굴도 모르지만 ‘난소암에 걸린 엄마를 둔 딸’로서 그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대화들 나누었다. 엄마에게 시도했던 새로운 치료법에 대해 정보를 전달했다. 한동안 엄마의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카페를 오랜만에 들어갔을 때, 낯익은 닉네임이 보였다. 그녀는 내가 알려준 병원으로 모친의 전원을 실행에 옮겼지만, 그 치료법이 그녀에게 희망을 주지 못했다. 나는 위로의 쪽지를 보내며 그녀가 느낄 고통을 가늠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나의 엄마는 아직 내 옆에 살아있었기에 그 고통을 완전히 가늠하지는 못했다. 나도 같은 경험을 한 뒤에야 그때 그녀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비슷한 상황에 놓인 그녀의 고통조차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듯이 많은 사람이 겪어보기 전까지는 암 환자에 대해, 엄마가 없는 딸로 살아가는 삶에 대해 가늠하지 못할 것이다. 그 증거는 특히 언어에서 많이 나타난다. 엄마의 암 투병을 지켜보고 하늘에 엄마를 떠나보내면서 특정 단어에 대해서는 관대하지 못하고 예민하게 촉을 곤두세우는 나를 발견한다. 예전 같으면 귀에 들리지 않았을 단어들이 나의 귀를 파고들어 온다.


그중에 가장 자주 내 귀를 자극하는 것은 “암 걸리겠다”라는 말이다. 언제부터 “암”이라는 단어가 인터넷 댓글에, 우리의 삶 속에 등장했는지는 모르겠다. 과거의 현재의 사용 빈도도 정확히는 알기 어렵지만, 확실한 것은 나는 암 환자의 가족이 되고부터 이 단어가 내 귀를 파고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암이라는 병은 시간이 지날수록 극명히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리고 얼마나 끈질긴지 한번 사람의 몸에 자리를 잡으면 좀처럼 자리를 비키지 않는다. 그리고는 원래 주인의 몸을 조금씩 제 것으로 만든다. 여러 차례의 수술, 수십 번의 항암치료에도 암 덩어리는 점점 커져만 갔다. 참으로 지독한 병이다. 답답하고 스트레스받는 상황에서 “암 걸리겠다.”라는 말은 쓰는 것은 암에 대해 제대로 모르는 것이다. 암은 쉽게 걸리지도 않겠지만, 한번 걸리면 쉽게 떨어져 나가지 않는다. 가끔 감정 상태가 좋지 않을 때 이 말을 들으면 직접 두 눈을 마주하고 물어보고 싶다. “암을 경험해 보았느냐, 암에 대해 제대로 알고 하는 말이냐”고 말이다.


두 번째로, 사망, 심폐소생술 같은 생명 혹은 질병과 관련되는 단어다. 그동안은 나와는 상관없는 단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엄마가 세상을 떠난 시점부터 수백 번을 들어야 했고, 입 밖으로 내뱉어야 했다. 엄마의 상속 처리를 위해 가장 먼저 전화를 걸었던 곳은 국민연금공단이었다. ‘사망진단서’라는 단어를 차마 내뱉지 못하고 눈물이 목소리를 눌러서 결국 통화를 중단했다. 이런 일들이 잦은 것인지 수화기 너머의 담당자는 차분히 나를 위로하며 전화를 끊어 주었다. 엄마의 상속처리를 모두 진행하기까지 몇 번이나 이를 물고 눈물을 참았는지 모른다.


이제 그 단어에 익숙해지는가 싶었는데 가끔 영화를 볼 때나 신문 기사에 “심폐소생술” 같은 단어가 나오면 갑자기 마음에 누군가 창을 꽂은 듯 시린 느낌이 든다. 코로나로 병문안이 길게 허락되지 않았던 날, 항암을 잘 견디던 엄마에게 갑작스레 폐렴이 찾아왔다. 산소포화도가 떨어져서 산소마스크를 쓰고 있는 엄마를 보고 집으로 가는 복도에서, 비상상황을 알리는 방송이 울렸다. 순간 엄마라는 걸 직감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엄마의 호흡이 갑자기 멈춰 심폐소생술을 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해야 했다. 그 단어들은 나를 그때로 데려다준다.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병원의 복도 그 끝으로. 이런 단어들이 영화나 뉴스가 아닌 일상에서 무방비 상태로 나를 공격할 때가 있다. 의외로 사람들은 이 두 단어로 비유법을 사용하거나 농담을 자주 한다. 그럴 때면 예상치도 못한 펀치에 황급히 자리를 옮긴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는 나의 감정을 숨기기 위해서.


내가 암 환자의 가족이 아니었다면, 엄마의 죽음을 경험한 딸이 아니었다면, 그 단어들은 나를 그저 스쳐 지나갔을지 모른다. 이제는 내 단어 사전에서 하이라이트 되어 있고, 감정을 품은 단어가 되었다.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단어들을 만나면서 타인의 단어 사전도 생각해본다. 분명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영역에서는 나 또한 너무 쉽게 그 단어들을 뱉어냈던 적이 없는지. 그래서 기준을 세우기로 했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단어, 질병, 사고에 관련된 단어들은 정확히 그 단어가 쓰여야 할 곳에서만 쓰겠다고. 최대한 그 선을 넘지 않겠다고. 완전할 수 없지만, 노력은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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